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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호 Dec 31. 2022

자전거로 떠난 산티아고 10

Day 7 (10/31) Burgos에서 Fromist, 76km)

지난밤 묵은 고도(古都) 부르고스의 알베르게는 고색이 창연한 건물이었다. 성()을 연상케 하는 돌로 된 높은 외벽과 육중한 문, 그리고 150명 이상의 순례자를 수용한다는 넓은 실내를 갖춘 건물이었지만 숙박비는 저렴했고 실내는 아주 현대적으로 깔끔하게 꾸며져 있어서 하룻밤 묵어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곳이었다.  

<80만 년 전부터 인류가 살고 있었다는 부르고스, 로마의 점령, 기독교와 이슬람의 분쟁, 나폴레옹의 침략 그리고 스페인 내전등을 겪은 곳이란다. 하루 정도 쉬었다 가기 좋은 곳>

아직도 어두운 이른 아침, 알베르게 문을 나서자 비에 젖은 도시의 돌로 포장된 길은 졸린듯한 가로등 불빛을 불규칙하게 반사하고 있었다. 다행히 기온은 그리 낮지 않았다. 반쯤 찢어진 판초 우의를 입고 장갑 위엔 식료품점에서 얻은 비닐봉지를 둘둘 말아 덮어 비로부터 젖지 않도록 보호했다. 


도시를 따라 길게 강이 흐르고 강둑을 따라 도심을 관통하는 도로엔 출근길을 서두르는 자동차들이 가득하다. 젖은 포도를 때리는 자동차 타이어가 내는 Road Noise만 Dominant할 뿐 도시의 거리는 신기할 정도로 조용하다.  


도심을 벋어 나니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빗방울도 거세진다. 바야흐로 걱정했던 폭풍우에 갇힌 꼴이다.

<싸구려 판초는 강한 역풍에 찢어지고 노란색 비닐봉지를 장갑 위에 둘둘 말아 비에 젖는 걸 방지하려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두 가지가 있다. 오르막길과 맞바람... 그중 나는 맞바람이 싫다. 오르막은 그래도 희망이 있다. 한참 오르다 보면 언젠가는 내리막이 나오지만 역풍은 그렇지 못하다. 특히 서쪽을 향해 달리는 경우 지구 북반구에서는 항시 불어오는 편서풍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엽적으로 동쪽으로 바람이 부는 경우도 있지만 그 건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오전에 심하게 내리던 비는 정오가 지나서 많이 약해졌다. 그렇지만 평야지대를 거침없이 불어오는 편서풍은 그 기세가 더욱 심해지는 것 같다. 앞으로 전진하기가 아주 힘들다.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들판엔 비에 젖은 바람소리만 요란하다>

자동차 내구시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고속내구 시험, 일반내구 시험, 고온/저온 내구, 열변형, 기타 등등 여러 가지 형태의 내구 시험이 있어, 그 모든 시험을 통과해야만 자동차를 고객에 인도할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여정도 말하자면 여러 형태의 인간 내구 시험이다. 끝없는 오르막길을 오르거나 내리막을 내려가야 하는 시험, 돌밭길이나 진창길 통과 시험, 우중 장거리 주행 시험, 끊임없이 역풍을 거슬러 가야 하는 시험.... 등등. 게다가 자동차 시험에서는 필요 없는 아주 중요한 시험이 추가된다. 이 모든 시험을 이겨내야 할 각오를 테스트하는 가장 중요한 시험, 즉, 정신력 내지 극기 시험이 그것이다. 순례를 시작한 지 일주일 남짓 지난 시점에 이 모든 시험을 다 거쳐본 것 같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시험이 앞에 도사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특히 어떠 종류의 극기 시험이 있는지 말이다. 


<한때는 아름다운 해바라기가 만발했을 텐데 이제는 시들어 버린 모습과 색갈이 그로테스크하다 > 

얼마를 갔을까? 자전거를 탄 어떤 중년 아줌마가 빠른 속도로 나를 휙 하고 추월해 간다. 길은 비에 젖어 진창길이거나 돌밭길인데도 나를 추월해 가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알고 보니 전기 자전거를 탔다. 아, 반칙!!  이어서 그의 남편이 지나가다 말을 건넨다. 나한테 방수가 되는 여분의 장갑 한 짝이 있는데 너 줄까? 하고 묻는다. 비닐봉지를 말아서 장갑을 비로부터 보호하려 했지만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해 장갑이 비에 젖어 버려 아예 장갑을 벗었는데 그런 모습을 본 것이다. 속으론 그래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짐짓 사양했다. 아니야, 이제 비도 안 오는데 뭘....


뜻밖의 호의에 감사했다. 그리고 말이다... 전기 자전거... 무엇이 문제일까?


순례자가 되기 위해선 세 가지 형태로 일정 이상의 거리를 가야 한단다... 첫째 걷거나, 둘째 자전거를 타거나, 셋째 당나귀나 말등의 짐승을 이용해 짐을 싣고 가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이 발명한 기계, 원동기나 뭐 그런 것들 말고 순수하게 인간의 근육을 이용해서 순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뀌는 세상에 그런 요구조건이 얼마나 유효할 것이가?


LGBT를 기독교가 용인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도 비슷하다. 세월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면 정답도 바뀌어야 하는 것인가? 예수가 재림해서 같은 질문을 받으면 뭐라 하실까?   

어쨌든 전기 자전거를 타고 가는 그들은 순례자의 자격에서 벗어날지 모르나 그들의 호의는 사이비 순례자의 그것보다 따듯하다. 착한 사마리탄의 후예라도 되는 것인가?

    

조금 가다 캐나다에서 왔다는 세명의 여인들을 만났다. 언뜻 보아도 70도 훨씬 넘어 보이고 건강도 좋지 않아 보이는 할머니와 그분의 두 딸, 중년의 여인들이 비를 맞으며 쉬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지친 할머니가 다시 원기를 찾을 때까지 빗속에서 막무가내 서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본래의미의 순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를 약간의 모험을 즐기는 중년의 호기심 많은 자전거 여행자라고 생각하지만 간혹 이 순례길을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탈출구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인생의 커다란 갈림길, 대표적인 예로서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들이 순례의 길을 떠난다고 하는데 실제로 나는 여행 도중 암환자를 만나기도 했다(우연이긴 하지만 그도 캐나다 사람이다). 그의 바램은 운동과 단련을 통해 암을 이기고 건강을 되찾는 것이리라. 혹시 예의 그 할머니에게도 건강문제가 있을런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이 틀리길 바라지만 어쨌든 무사히 건강히 여정을 끝내길 빌어 본다.   


<Fromist에 도착해 어떤 알베르게에 여장을 풀었다. 알베르게 앞 마을 모습>

Fromist에서 하루밤 묵어갈 예정은 아니었지만 비가 갑자기 심해지고 정말 지쳤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 가기로 했다. 지치고 힘들때 쉬었다 갈 수 있는 숙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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