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딸.
세상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순간부터 도리 없는 법칙이자 섭리긴 하지만,
그리고 그게 아빠의 탓도 아빠가 해줄 무엇도 없는 것이긴 하지만,
아빠가 네게 가장 미안한 것은 이 세상이 경쟁하는 세상이라는 거야.
하다못해 인큐베이터에서 분유 얻어먹는 것조차 줄서기에 따라 누구는 한참을 배고파 울며 기다려야 하고 누군 줄을 잘 서서 배고프단 신호를 보내자마자 바로 얻어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야.
그 이후로도 세상의 모든 규칙은 늘 줄서기와 기왕이면 줄 잘 서기였을 거야.
물론 집안에서야 네가 제일이고 늘 1등으로 뭐든 해주는 게 당연하지만.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할 것 없이 다수가 모이면 늘 키 몸무게 힘 성별 이름 등등 온갖 것들로 줄을 서고 밀리고 빼앗고의 연속이지.
좀 더 성장하면서는 법과 규칙에 따라서 줄을 세우므로 좀 덜 폭력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건 외형만 그런 거지 실제로는 더 치열하고 삭막한 게 사회생활이야.
가혹하지만 모두가 다 잘살고 모두가 다 행복할 수 없는 게 세상의 진실 아니냐.
이 세상에 주어진 자원은 늘 한정되어있지. 무한대가 아니야.
그게 돈이건 땅이건 농산물이건 말이야.
그런데 대부분 자신의 노력보다 더 큰 대가를 원한단 말이지.
그렇게 욕심을 부리고 좀 더 효율적으로 뭐든 끌어모으는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일컬어 우리는 ‘부자’라고 부르지.
그런 부유층이 전 세계 통틀어 인구의 10%쯤 되는 사람들이,
전 세계 자산의 90%쯤을 갖고 있을 거야.
정확한 통계는 아니어도 대충 그래.
세계지도에 나와 있는 나라 중 (영) (불) (스) (포) 이런 게 가끔 있어.
과거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나라들이지.
그들뿐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에는 벨기에, 네덜란드 같은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통치하던 식민지들도 많아.
그리고 현재 부유 국가로 살아가는 그들은 대개 그렇게 다른 나라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했던 조상들의 덕을 크게 보고 있지.
통치 기간만 백 년이 넘는 곳들도 있고, 그 여파로 원주민어를 잃거나 식민지배를 했던 나라의 언어가 공용언어로 자리 잡은 나라들도 있으니까.
국가냐 개인이냐의 차이일 뿐이지 모든 인간 사회에는 경쟁이 필수야.
아빠도 경쟁이 좋진 않지만, 현실이 그래.
어떤 인류학자들은 인간의 본능적인 경쟁심이 인간 문명과 사회를 발달시킨 원동력이라고도 해.
어찌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해.
만약 세상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고,
타인들과 경쟁하지 않고 개개인별로 각자 살아도 되는 그런 세상이 되었다면 하고 상상을 해보자.
아빠의 생각에는 아마, 세상이 더 이상하게 변할지도 몰라.
고대 로마의 지배시대 귀족들이 괴이한 탐식과 유혈이 낭자한 퍼포먼스 같은 것에 열광했던 것처럼 말이다.
순수한 평화의 시대를 꿈꾸지만, 인간의 본성은 그런 고요한 평화의 시대를 참아내지 못하는 것 같아.
아빠가 보면 유아기의 어린이들도, 거의 잘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는 어린애들조차 서로 어우러지면 상대 것을 빼앗고 자신이 먼저 움켜쥐려고 하고 그게 안 되면 떼를 쓰고 그런 게 보여.
그게 생존을 위해 당연한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해.
그렇다 보니 본능적으로 내 앞에 뭔가를 쌓아야만 안심하는 부류가 많지.
물론 개중에 정말 성인 같은 사람들도 있고,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평생 거기서 기쁨을 얻는 사람들도 있긴 해.
모두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참 평화로울 거야.
아빠가 아는 바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의 식량 생산은 인구수를 넘어섰었어.
즉 전 세계의 식량 생산량이 전 세계 인구들을 먹여 살리고도 남는다는 거지.
그것도 매년 말이야.
물론 어떤 곳은 풍부한 땅과 물과 기후적 영향으로 자국의 인구들이 먹고도 넘칠 정도로 생산량이 좋은데, 어떤 지역은 일 년 내내 물을 길어다 붓고 온갖 노동을 죽어라 해도 식구들 입에 풀칠도 어려운 환경도 있으니 다르지 생산량은.
그렇지만 전 세계 인간들이 모두 긍휼한 마음으로 나눠 먹고자 한다면 적어도 굶어 죽는 기아 난민들이 있는 나라는 안 생길 거란 말이야.
딸아.
인간들이 평화로울 수 있는 조건들이 모자라서 평화롭지 않은 게 아니야.
본능이자 대책 없는 본성이지.
그러니 불가해한 평화를 기대하기보다는 너 자신의 평화를 지키는 방법을 생각하렴.
세상은 결국 나 자신이 단단한 사람에겐 평화로운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