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혹은 인연
진상커플의 웃기는 프러포즈가 비극으로 끝난 지 일주일쯤 지났을까.
그날은 간혹 들리던 복권방 영감님이 어쩐 일로 술에 취해 들어온 거야.
늘 늦은 영업에 식사만 마치곤 돌아가는 구두쇠 양반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술에 약간 취한 것으로 보이더라고.
그러더니 들어오자마자 가타부타 말없이 또 소주를 찾는 거야.
그래서 원래 그런 건 없지만 심야식당 드라마 마스터가 그러듯 나도 불쑥 엉뚱한 흉내를 냈어.
- 영감님. 죄송한데 저희 식당은 소주 한 병 이상은 못 드립니다. 규칙이라 서요.
- 뭐? 그런 규칙이 있었수? 전에 보니 다른 사람들은 여러 병 마시던데?
- 네. 오늘부터 생긴 규칙입니다. 제가 주인이니 제 맘대로지요.
영감님은
‘ 그래 뭐. 늘 주인들이 맘대로 하는 거지 뭐. 이놈이나 저놈이나’
라고 투덜거리며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맥주 컵에 따라 드시는 거야.
영감님이 신세한탄 비슷하게 늘어놓은 반 술주정은 이랬어.
복권방이 있는 자리 건물주가 가게를 계약기간 만료 되었으니 내놓으라고 한다는 거야.
이리저리 사정을 알아보니 건축주가 직접 그 장소에 복권방을 내려고 한다는 거지.
이런저런 편법을 동원해서 자격을 따낸 모양이라고.
천생 영감님은 어디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데 이게 지역제한도 있고,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접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였어.
안 됐긴 한데 내가 뭐 어쩌겠어.
서비스로 속풀이 안주라도 해드리려고 보니 마침 엊그제 지방 후배가 보내준 낙지가 있다는 게 생각났어.
굵은소금으로 낙지를 죽죽 훑어서 씻고,
내장과 부리를 잘라 낸 후 찬물에 소주를 타서 잠시 담가 놓았어.
혹 비린내가 날까 싶어서.
멸치 다시마 육수를 냄비에 넣고 무 와 알배기 배추 잎과 청양고추와 양파를 넣어 한소끔 끓였지.
거기에 소금 간을 하고 다진 마늘을 넣고.
미나리가 원칙 이라곤 하는데 없어서 그냥 쑥갓을 넣었어.
펄펄 끓어오를 때 낙지를 넣어 낙지색깔이 살짝 변할 때 꺼내야 해.
안 그러면 질겨지니까.
이렇게 하면 심야식당 식 연포탕이 완성되는 거지.
끓여진 연포탕을 영감님 앞에 내밀었더니 뭐냐 하는 얼굴로 쳐다보더군.
그래서 서비스니까 드시고 속 좀 푸시라 고 말씀드렸어.
노인네가 멀거니 연포탕을 쳐다보다가 다시 내 얼굴을 보다 한 수저 뜨시는데,
좀 속이 울컥하더군.
저 정도 나이가 들어서 건강 이라거나 심심풀이가 아닌 생업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것.
그게 참 얼마나 고단한 삶인 건지.
물론 박스 줍는 노인들도 있는데라고 생각은 하지만 씁쓸했어.
- 이거 참 시원 하구려. 고맙수. 이렇게 개운한 연포탕은 참 오랜만 이오.
- 입에 맞으시니 다행입니다. 드시고 싶으실 때 말씀 하세요.
- 아니오. 이렇게 늦은 새벽 시원한 국물을 먹으니 속이 다 후련해지는구려.
음식 이란 게 참 묘한 것 같아.
어떤 이에게는 추억을. 어떤 이 한테는 인연을.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이지만 맛을 본다는 건,
인간이 가진 행복 중 하나인 것 이 아닐까.
이미지 네이버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