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엄마를 올해 갑자기 잃고 처음으로 맞는 크리스마스였지.
어떻게든 네 상실감을 잊게 해주고 싶어서 몸부림을 쳤음에도 아빠는 또 나름대로 상실감에 힘이 든 성탄이었어.
이전의 성탄절도 그다지 의미가 있게 지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이 함께 트리도 꾸미고 밖에서 외식도 하고 그랬었는데.
올해도 트리는 꾸몄고 코로나 때문에 밖에 나가서 뭘 먹긴 좀 어려웠지만,
나름 예매한 뮤지컬을 보고 밤에 네가 잠들었을 때 몰래 준비했던 선물들도 트리 앞에 깔아놓아서 성탄절 아침에 네가 기뻐하는 모습에 잠시 마음이 뭉클하긴 했었네.
아빠가 부족한 솜씨로 만들어준 함박스테이크도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추어주며 먹어준 네게 고마워.
일전에 네가 아빠에게 툴툴거리던 게 생각나.
유치원 때 아빠가 산타가 없다고 말해주는 바람에 동심이 파괴되었다는.
글쎄.
아빠가 좀 현실적이고 재미가 없는 사람이긴 하지.
변명하자면 아빤 뭔가 희망을 품다가 그 희망이 비현실적이란 걸 느끼는 게 더 싫어서 그럴 거야.
아빠의 어린 시절은 그리 넉넉하지도 희망적이지도 않았었는데도,
여기저기서 읽은 책들과 라디오를 통해 들었던 어린이방송 같은 것들로 별로 현실적이지 않은 희망과 바람을 많이 가졌었거든.
그렇다 보니 어느 정도 현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느낀 배신감이 훨씬 더 컸었어.
너는 또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아빠 생각은 그래.
온갖 성탄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와 전설, 동화 같은 것들이 만들어진 시기가,
어린이들에게 한창 가혹하게 괴롭던 시절이 아니었나 하고.
그래서 가혹하고 냉랭한 현실에서도 희망을 품으라고 만들어진 거 아닌가 하고.
그러면서도 몇몇 유명한 동화들의 비극적인 결말들을 보고는 대체 산타가 있고 그런 거라면 왜 이렇게 죄도 없는 아이들은 절망적인 상황들이 되었나 하는 생각들을 가졌던 것 같아.
‘플란더스의 개’ 같은 동화들은 정말 어린 마음에 너무나 비극적이었거든.
올 한 해.
너와 아빠에게 참으로 가혹하고도 절망적인 상황들이 있었지.
어리디 어린 네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불행이 오겠나 하고 아빠도 새삼 절망했어.
그런 상황에서 산타의 존재란 과연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하고.
누가 죄를 지었고, 아니면 그저 불행이라는 운명에 빠지기도 한다면 어차피 공평한 건 아니잖아.
그렇다고 해서 인과응보라고 하기도 그렇고.
사실, 이 순간에도 더 절망적인 삶을 보내는 다른 나라의 더 가혹한 환경의 아이들을 생각해보면 산타가 그 아이들에겐 무슨 의미인가 싶어.
이 모든 것들을 어린 너에게 일일이 설명할 이유도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뭔가 막연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소원을 빌어보라 하기도 아빤 어렵더라.
네 진짜 소원이 뭔지 아빠는 알고 있고,
그 소원이 이뤄지긴 불가능하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으니 말이야.
어른이라는 게 뭐든 다 해줄 것 같던 어린 시절은 아빠의 기억에는 없어.
만약 아이들이 그렇게 느낄 수 있다면 정말 이상적인 보호자일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곧 자라게 된 아이들이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면 그게 더 아이들에게 나은 건지는 모르겠다.
딸.
어른들도 나이만 먹었지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뭔지 모를 모호하고 불투명한 가능성에 소원을 걸기도 하고,
때로 무의미한 신념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쓸모없는 집념으로 시간들을 탕진하기도 해.
나이를 많이 먹는다고 다 현명해지지는 않더라.
그러니 딸아.
언젠가 네가 어른이 되어 이 글을 읽었을 때,
나는 왜 어른이 되어서도 이리 무력하고 이리 마음이 약할까 하는 마음이 든다면.
그걸로 자책하거나 할 필요 없음을 아빠가 말해주는 거야.
어른도 완벽하지 않아.
평생을 완벽하게 살아온 사람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단다.
그러니 자신이 좀 모자라다 싶어도 그걸로 자책 말고 편한 마음으로 살아가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