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청음초 13화

청음초 13

캣맘

by 능선오름

13.

얼얼해진 입을 대강 헹구고 화장실에서 졸졸 흘러나오는 녹물 맛 나는 수돗물로 양치질을 한 사내는,

알 수 없는 분노와 자기혐오에 휩싸여 누가 듣든말든 개의치 않고 거칠게 몸을 씻었다.

어찌 보면 그게 현재 소심한 사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과감한 행동이라고나 할까.

찌든 냄새나는 바짝 마른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아 낸 사내는,

매트리스 한구석에 허물처럼 흐트러져 있던 구멍이 군데군데 뚫린 티셔츠와 반바지를 주워 입고

불쾌한 포만감을 쓰다듬으며 매트리스에 누웠다.


신용불량이라는 덫 아닌 덫에 걸린 이후로 흔하디 흔한 휴대폰도,

티브이도 컴퓨터도 라디오도 없이 살아온 사내에게 달리 무슨 할 일 같은 것 은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멀쩡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매일처럼 야근에 늦게 퇴근하여 딱히 티브이를 볼 만한 시간도 거의 없었었고,

딱히 컴퓨터로도 크게 할 만한 일은 없었으며,

라디오는 그저 알람 정도 역할만을 해 왔기에 반드시 필요한 물건들이 아니었다.


보통 사내의 일상 이란 도시 속에서 고립된 로빈슨 크루소 같은 것 이었었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경제적 문제로 발생하기 시작한 촘촘한 빚의 그물망이,

사내로부터 조그만 것 들조차 다 뺏기거나 버려진 상태였었다.

그나마 어렵사리 현재의 삶을 꾸려가게 된 이후로는 애써 그런 무의미한 것들에 돈을 쓸 이유도 없었거니와, 이른바 '신불자'라는 불리한 입장으로 일당벌이를 하고 있는 현재로서는 그럴만한 여유는 사내에겐 없었다.

그런 사내에겐 오늘과 같은

- 어찌 보면 거의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인 -

쇼핑이라는 행위는,

그의 한 달 노임의 큰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니 사내로서는 정말 무리한 지출을 한 것이었으나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


그는 엉뚱하게도 이 허물어져 가는 것 같은,

사회의 허물어져 가는 변두리 구석에서 자신에게 청음초라는 임무를 스스로 부여하였고,

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제대로 된 장비를 구입한 것은 사내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정당성이었다.

비록 그게 누구에게도 인정을 받거나 납득이 될 만한 일은 아니라고 해도,

사내 스스로는 자신이 한 여자의 생명을 구했다는 놀라운 사실 만으로도

자신의 임무에 대한 당위성이 있는 것이라 나름의 합리화를 하기엔 충분하였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매트리스에 누워 이어셋을 귀에 끼워 넣었다.

그녀는 또다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어……. 맥주 사러 나갔다 오려는데 누가 현관문에 만두 봉지를 끼워 놓았더라고.

온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라서 나는 네가 혹시 왔다 갔나 했어.

어. 아니라고? 누가 그런 짓을 한 거지? 아니.

봉투를 보니 이 동네 분식집 것은 아닌 거 같아.

뭐 별일 있겠나. 맛은 괜찮던데”

나지막이 들려오는 그녀의 허스키한 음성.


그리고 뭔가를 먹고 마시는 소리 들.

부스럭 거리는 봉투 소리.

사내는 그녀가 경계심 없이 자신이 그녀의 현관문 밖에 걸어놓은 만두를 먹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하며 어딘지 뿌듯한, 아침 출근길에 느꼈던 기분이 다시 가슴에 느껴졌다.

보잘것없던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었다는 느낌.

길거리 고양이를 보살피는 캣맘 같은 마음.

상처 입은 유기견을 돌보는 것 같은 심정.

그리고 그 상대방이,

벽만 없었다면 바로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는 거리에서 그가 사 온 음식을 먹고 있다는 현실.


사내는 다시 한번 자신이 청음초로서의 역할을 하겠다고 자처한 것 이 운명적인 것이라고 자위하며,

그녀가 알지 못할 누군가와 길게 통화를 이어가는 것을 들으며 샅에 두 손을 뭍은 채로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미소를 띠워가며.

렘수면으로 빠져드는 사내의 귓가로 여자의 음성이 점점 멀어져 갔다.

“ 그래......... 나 헤어졌어....... 죽으려고 했었는데......”

keyword
이전 12화청음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