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청음초 14화

청음초 14

사회생활

by 능선오름

14.

사내는 노조 사무실에 서 있었다.

법적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색내며 회사에서 내어 준 노조 사무실은,

건물 지하의 환풍도 제대로 되지 않는 창고 같은 곳이었다.

그나마 초창기 노조원들이 여기저기 그러모은 버려진 집기들로 인하여,

그럭저럭 사무실 비슷한 모양새가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간한 경우 아니고서는 사실 노조 사무실에 사내가 방문한 적은 없었고,

더더구나 동료들 사이에서도 ‘히키코모리’란 별명으로 불리던 사내가 적극적으로 노조 활동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노조위원장이라는 자가 그를 일부러 부른 것 이어서 달리 피해 갈 방법이 없었다.


노조위원장이라는 사내는 지금의 회사 공장으로부터 잔뼈가 굵어 온 억세게 보이는 사내였다.

그 곁에는 노조 총무라고 불리는 바싹 마른 북어 같은 사내 한 명이 한껏 인상을 쓰며,

말없이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사내를 곁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노조위원장은 길게 찢어진 아귀 같은 입매를 가지고 있고,

눈빛마저 뭍에 끌려올라온 아귀처럼 혼탁한 광채를 번쩍 거리는 인상으로 사내에게 입을 열었다.


“그니까......... 당신도 노조원 이잖아!

노조니까 최소한 그 살생부라는 건 알려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이거지.

말을 퍼트리겠다는 게 아니라 우리도 뭘 알아야 사측하고 조정이란 걸 할 게 아니냐고.”


사내가 인사과 직원이라는 게 발단이었다.

중견 기업 이라곤 하지만 크지 않은 회사라 인사과 직원이 많지 않았는데,

그중 간부급을 제외하면 노조로 소속되어 있는 건 몇 안 되었고 하필 사내가 외환위기 여파로 인한 구조조정 팀에 들어가 버렸다는 게 드문드문 알려지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난 것이다.

노조위원장이 몸이 달아서 인사과 직원 중 가장 만만하게 보인 사내를 불러 채근하는 것이었다.

사내는 창백해진 얼굴로 어금니를 악물며 아귀에게 말했다.


“ 제가 아는 건 정말 없습니다.

저는 사원 명단만 정리하고 인사고과 정리만 할 뿐 결과도 무엇도 제게 공유하는 건 없단 말입니다.”


아귀 옆 마른 북어가 입을 열었다.

“ 아 이 친구 정말 갑갑 허네. 그니까 당신한테 그걸 누가 주겠냐 고요.

우리도 안다고요. 근데 당신도 귀가 있잖아.

옆에서 하는 말들 잘 듣고 또 이따금 카피도 좀 하고 해서 정보를 달란 거지, 정보.”


북어는 마치 코미디 방송에서 만담을 던지는 듯 사내에게 말을 던지곤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사내는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구조조정 팀에 들어 있긴 하지만 간부도 아닌 자신에게 누가 최종 명단 같은 걸 보여주겠는가.

게다가 구조조정 팀장이라는 임원은 모두에게 이미 으름장을 놓은 사실이 있었다.

비밀 엄수가 안 된 사람은 무조건 일 순위로 내보내겠다고.

사내는 완강하게 버티다가 아귀의 욕지거리를 뒤로 하며 노조사무실을 뛰쳐나왔다.

그러다 우연히 주차를 하고 내리던 임원과 눈이 마주친 건 얄궂은 장난 같은 것이었고,

그다음 주에 사내가 구조조정 대상으로 포함이 되어 있던 것 은 그 탓이었는지 뭔지 사내는 몰랐다.


다만, 구조조정 팀장이라는 자가 조정 명단 발표 전 날 팀원들을 모아 놓고 한 얘기는 이랬다.


‘ 조정의 공정성을 위해서라도, 우리 조정팀에서도 조정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어느 정도 노조에서도 납득을 할 것이다.

혹 자신이 조정 대상이 되더라도 서운하다거나 억울해할 게 아니라,

자신이 그동안 팀 내 규칙을 어기거나 직위를 이용해 함부로 과시를 하고 다닌 건 없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어쩐지 팀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사내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 내리는 것 같았지만,

사내는 믿었다.

자신은 정말 회사에 불이익이 될 일을 한적도 없고,

그간 지각 결근 한 번 한적도 없었으며 법적인 연차조차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우직하게 회사생활을 했으니까.

사내의 생각에 자신은 정말 '열심히' 회사생활을 해왔으니까.


회사 현관에 붙여진 구조 조정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붙어 있는 걸 본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현관 로비 구석에서 아귀와 북어가 자신을 보고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사내는 순간적으로 토악질이 솟구쳐 옴을 느꼈다.

주변에서 명단에 포함된 여직원들이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내가 다시 잠을 깬 것 은 흐느끼는 여직원 들 때문이었다.

아니, 현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꿈속에서 그런 상황을 불러온 것 일지도 모른다.

사내가 눈을 떴을 때 그의 귀는 끼고 잠들었던 이어셋 때문에 미미한 통증이 있었고,

사내의 고막으로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명료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303호의 여자는 낮은 소리로, 그리고 긴 호흡으로 흐느낌을 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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