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음초를 구축하다
12.
사내는 바빴던 걸음에 숨을 몰아쉬며 지린내 나는 계단을 올라 자신의 둥지 잎에 섰다.
고개를 돌려 옆 303호의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어제 여자가 내놓았던 짜장면 그릇은 없어진 상태이었다.
사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시내에서 사 온 물건들 중,
저녁거리 삼아 사 가지고 온 찐만두가 든 봉투를 303호 현관문에 걸어놓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삐이꺽. 녹슨 철문은 언제나 그렇듯 비명을 지르며 사내의 손길을 받아 주었다.
사내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아걸었다.
아마도 평상시대로 라면 303호의 여자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어젯밤 사건의 여파로 오늘 종일 집에 있을지도 몰랐다.
행여나 낮에 그녀가 마음이 바뀌어 무슨 일을 다시 벌인 건 아닌지 불안감이 사내의 뒷덜미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사내는 씻을 생각도 하지 않고 사 가지고 온 것 들을 풀어놓았다.
박스를 열고 도청장치들을 꺼내어 방으로 가져가 매트리스 위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현관 입구에 있는 전원차단기를 내리고 드라이버를 이용하여 매트리스 위,
옆방과의 칸막이벽에 붙은 전원 콘센트를 조심조심 분해하기 시작했다.
콘센트 덮개를 열고, 뭉치를 잡아당겨 전선을 끊고 절연테이프를 이용하여 끊긴 전선 부위를 조심스레 감싸고 콘센트 뭉치가 나온 공간에 작은 스피커를 집어넣고 청테이프로 밀봉하였다.
스피커선이 연결된 회로기판은 원래의 포장박스에 넣고 전원 어댑터와 이어셋을 연결하고 박스의 뚜껑을 덮어서 테이프로 밀봉한 후,
어댑터 전원 플러그를 방구석에 있는 다른 콘센트에 끼워 넣고 박스를 매트리스와 벽 사이에 감춘 후 이어셋만 매트리스 위로 끄집어 내놓았다.
이어서 사내는 사 가지고 온 방음 스펀지 뭉치를 풀어서 303호와의 경계벽 전체에 고루 바르기 시작했다.
스펀지는 평평한 면에 양면테이프가 붙어 있어서 비교적 수월하게 벽에 밀착되었다.
사내의 방 한쪽 면은 검은색에 가까운 올록볼록한 스펀지가 덮여서 어두운 방을 더욱 어둡게 만들어 버렸지만,
나름 사내 방에서 나는 소음들을 어느 정도는 묻어버릴 수 있을 것이었다.
사내는 스펀지와 함께 사 가지고 온 우레탄폼 뭉치를 풀어서 자신이 딛고 움직이는 동선
– 그래 봐야 비좁은 방과 거실이라서 길지 않은 것이지만 –
바닥을 중심으로 매트처럼 우레탄폼을 깔고 벽에 붙이고 남은 스펀지들을 거실의 작은 싱크대 주변과 소음이 날 만한 곳곳에 붙여 나갔다.
작업을 마치고 일어서서 다시 전원차단기를 올리고 나자 사내의 방은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음향 녹음실 같은 분위기로 보였다.
온갖 테이프 냄새로 한동안 머리가 좀 아프긴 하겠지만 사내는 아주 오랜만에 순수한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공간에 만족하였다.
사내는 배고픔도 잊은 채 매트리스로 돌아가서 늘어져 있는 이어셋을 하나씩 귀에 꽂고 웅크리고 앉았다.
미세한 잡음 소리들이 들리는 가운데 303호의 소음들로 여겨지는 소리들이 이어셋을 타고 사내의 청신경으로 도달했다.
텔레비전 소리, 컴퓨터라도 만지고 있는 듯 타닥타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이따금 낮게 들리는 그 여자의 한숨 소리.
사내는 안도의 숨을 조심스레 내쉬며 귀에서 이어셋을 떼어 냈다.
갑자기 엄청난 허기가 밀려들면서 반나절을 돌아다닌 피로감이 물밀 듯 닥쳐왔다.
사내는 조심스럽게 거실의 싱크대로 걸어갔다.
낡아서 본래의 노란빛이란 다 삭아 없어진 양은냄비에 물을 올리고,
싱크대 하부 장에 든 유통기한이 지난 라면을 꺼내어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사내는,
지난밤부터 시작하여 조퇴 후까지 근래 들어 이토록 무언가를 치열하게 움직이고 물건을 구매하고 했었던 일이 있었던가 곰곰이 생각에 빠져 들었다.
아마도 없었다.
그저 그런 중견기업에 들어가고,
달리는 마차의 말처럼 앞만 보고 채찍질에 따라 움직이고,
그러다가 탈락하고 세상에 치여 이리저리 구르다가 살아 는 있으되,
사회로부터 인정은 받지 못한 신용불량자로 낙인 아닌 낙인이 찍혔다.
그 이후로 날품팔이에 가까운 일로 당장 먹고살 것에만 온전히 집중하여 지내 온 시간들이 사내의 늙어가는 뇌세포들을 스쳐 지나갔다.
‘말’에서 ‘노새’로 형태만 달라졌을 뿐,
사내는 여전히 세상이라는 전장에서 장수도 용사도 아닌 그저 짐을 끄는 역할이었을 뿐,
이따금 누군가에 의해 편자가 바뀌고 또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당근에 감사하며 앞만 보고 달리고 달려왔던 것이다.
낡은 냄비로부터 끓는 물이 요란하게 쭈그러진 뚜껑을 밀어 올리는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사내는 비로소 자신의 눈가에 액체가 흐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사내는 아우성치는 물속에 수장이라도 하듯 라면을 집어넣고 불을 끈 후 싱크대에 일어선 채로 용암 같은 라면 줄기를 입안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입천장이 다 벗겨지는 지도 느끼지 못한 상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