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청음초 10화

청음초 10

좋은 날

by 능선오름

10.

사내는 천근같이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창밖은 희부옇게 비좁은 골목 사이로 아침볕이 스며들고 있었다.

요란스러운 청소차 소리, 계단을 오르내리는 이웃들의 소리, 하루의 전쟁을 준비하는 소란함 들이 벽으로, 천정으로, 창틈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왔다.

새벽에 활극을 벌인 사내의 온몸은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곰팡내 나는 매트리스에 달라붙은 등판에는 끈적끈적한 땀이 흥건하였다.


사내는 몽롱하고 뒤엉킨 듯한 머릿속을 보이지 않는 손길로,

박스 포장을 정리하듯 하나하나 접고 밀치고 끼워 넣으며 잠으로부터 벗어났다.

잠시 천정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사내는 몸을 반 바퀴 돌려 303호와 맞닿은 벽에 돌출되어 있는 매립 콘센트에 귀를 바짝 대고 기울였다.

밖에서 들리는 소란한 아침의 활기들을 애써 무시하며 한참 귀를 기울이다 보니 고르게 숨을 내쉬는 그녀의 호흡이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아마 곤히 잠든 것이리라.


사내는 아주 완만한 동작으로 몸을 두어 바퀴 돌려 매트리스로부터 벗어났다.

머리는 까치집처럼 헝클어지고 눈은 잔뜩 충혈되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은 명료하였다.

사내는 발끝을 들어 짙은 어둠을 나아가듯 느리고 완만하게 욕실로 들어섰다.

불은 일부러 켜지 않았다.

불을 켜면 욕실 천장에 다린 고물 환풍기가 덜덜 대며 옆집에 까지 소란한 소음을 줄 것이고 사내는 그녀의 모처럼의 숙면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지금의 심정으론 바깥에 튀어나가 모든 시끄러운 아침 소음의 원인들을 다 뜯어말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야 그녀가 곤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니.


사내는 태극권을 하듯 느릿하고 느릿한 동작으로 고요히 물을 손에 움켜잡고,

천천히 얼굴에 바르고 닦아내고 마치 어두운 성소에서 세례 의식을 취하듯 고요하고 성스러워 보이는 동작을 사용하여 세수를 했다.

어스름한 욕실은 군데군데 타일이 깨어져 나가고 반쯤 부서진 변기와 냄새나는 배수구가 전부였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의 사내에게는 왠지 다정하고 아련한 어린 날 기억의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사내는 힘겨워하는 비루한 근육들을 힘껏 당겨가며 실로 오랜만에,

일주 내내 입던 점퍼와 바지를 놔둔 채 간이 옷장에 걸린 옷 중 가장 깨끗한 재킷과 세탁된 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스킨로션 병을 열어 얼굴에 엷게 발랐다.

들큰 하고 차가우며 조금 향긋한 냄새가 사내의 얼굴에 엷게 발라졌다.

사내는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으로 현관에 서서 평소 신던 낡은 운동화가 아닌 사내가 지닌 유일한 가죽 케쥬얼 신발을 꺼내 신었다.

그리곤 잠시 현관에 서서 건넛집과 경계를 이루는 벽을 손으로 짚고 있었다.


이 벽 불과 몇 발자국 안에 그녀가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불과 몇 시간 전 자신이 살려낸 여자였다.

불과 몇 시간 전 그녀는 사내와 가슴과 가슴을 맞닿은 채로 누워있었고,

함께 호흡을 나누었으며 잠시 서로의 얼굴이 붙을 만큼 붙어서 그녀의 날숨이 사내의 들숨으로 사내의 날숨이 그녀의 들숨으로, 서로 하나의 공기를 폐부로 주고받았었다.

아주 잠시간이었으나 그녀의 피부는 놀랍도록 뜨거웠었고 비현실적으로 부드러웠다.


사내는 자신이 그녀를 지켜냈다는 사실에 벅찬 희열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바깥으로 나가 그녀의 아침잠을 방해하는 모든 소음들을 다 부숴버리고 싶을 만큼 사내는 그녀의 곤한 아침잠을 지켜주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녹슨 철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온 사내는 복도에서도 아주 조심스럽게 계단에서도 발꿈치를 들고 고요하게 빌라를 벗어났다.

지린내 나는 빌라 현관을 나서며 흘낏 그녀가 몇 달 전 내려다보던 그녀 방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피식 웃으며 알 수 없는 뿌듯한, 마치 아내를 두고 출근하는 가장 같은 마음으로 너저분한 골목길을 나섰다.

왠지 오늘은 복잡하니 미어터지는 통근버스 안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사내는 처음으로 조퇴를 하였다.

볼 일이 있다고 간곡하게 말하는 그를 마뜩잖은 눈길로 바라보던 작업반장은 사내를 위아래로 훑으며 혼잣말로 느물거렸다.

“ 웬일로 옷을 다 갈아입었데 에? 얼씨구. 게다가 좀 씻기까지 한 거 같은데? 주제에 그래도 연애질도 가끔 하는 모양이야?”

영락없이 군대에서 자살했던 밉상의 선임병이 환생을 한 것 같은 작업반장은,

무슨 커다란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근엄한 얼굴로 사내의 이른 조퇴를 ‘윤허’ 하였다.

사내는 오랜만에 자신이 일 년 전 등지고 나온,

정확히 는 자신이 밀려 나온 도시의 한 복판으로 육신을 옮겼다.


건축자재와 전자상가가 즐비한 이곳은 사내가 막일에 손을 담그게 되기 전에 고교시절,

광석라디오 조립 이라든지 이런저런 부품을 구입하기 위해 드나들던 곳이다.

거의 이십여 년 이 지난 후이기에 조금 낯설기도 하련만 현재의 사내가 그러하였듯,

한 때는 도시와 더불어서 나름 화려한 껍데기를 뒤집어쓴 일도 있었으나 발걸음을 한걸음 깊이 디밀어 들어가 본 속속들이 골목들은,

이십여 년 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퇴락하고 무너져 가는 모양새가 세월이 멈춰져 있는 듯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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