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기억
9.
여자는 사내에게 달리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현재의 모양새들과 띄엄띄엄 말했던 사내의 말들이,
이미 여자에게 어떤 상황 인지를 대강 이나마 인식시켜 준 것 같았다.
여자는 긴 숨을 내쉬며 자신의 목에 새겨진 나일론 줄의 자국을 어루만지며 뭔가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고, 사내는 조심스럽게 침대로부터 몸을 빼어 쭈뼛거리며 여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 저기....... 괜찮으시면 저는 이만........ 갈게요.”
사내는 뒷걸음질 치듯 그녀의 좁은 방을 빠져나오면서 모기만 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더 보태었다.
“ 무슨 일 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짓 하지 마세요....... 힘들어도 살아야죠. 하나뿐 인 생명이잖아요”
마치 티브이 공익광고 문구 같은 말을 건네고 비칠 비칠 방을 빠져나오는 사내를,
여자는 눈을 똥그랗게 뜬 채 희한한 생물을 보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삐걱’ 소리를 내며 조심스레 녹슨 현관문을 닫는 사내의 귓가로 그녀의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둥지로 돌아온 사내는 와들와들 떨리는 팔을 감싸 안으며 어둠 속 알람시계를 보았다.
새벽 네 시 사십 분.
아직 일어나려면 한 시간 여 여유가 있기에 사내는 땀으로 젖은 몸을 조심스레 매트리스에 뉘었다.
육체의 흥분은 쉬 가라앉지 않았고 온몸에 치솟은 아드레날린 때문에 사내는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샅에 두 손을 묻은 채 태아 같은 자세로 다시 렘수면에 빠져 들었다.
사내의 꿈속에 이른 밤에 등장했던, 목을 매단 선임 병은 다시 살아 있었다.
놈은 사내와 바짝 붙은 침상에서 사내의 곰팡내 나는 군용 모포를 슬며시 쳐들고 사내의 샅으로 손을 슬금슬금 디밀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사내가 선임 병의 손을 반사적으로 움켜쥐자 선임 병이 귓가에 구린 입 내음을 낮게 뱉어냈다.
“ 이 새끼가. 너 군 생활 꼬이고 싶어? 어디 선임자 손을 잡고 지랄이야”
사내는 움찔하며 손아귀의 힘을 슬며시 풀었다.
선임 병은 이젠 아예 거침없이 사내의 팬티 속으로 손을 넣고 사내의 성기를 부드럽게 감싸 쥐고 주물럭거리기 시작하였다.
불두덩부터 귀두까지 선임 병의 거친 손 피부와는 사뭇 다른 부드러운 느낌이 사내의 하복부를 서슴없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어이없는 건 소스라친 사내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내의 성기가 한껏 발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건 마치,
군 입대 전 몇몇 그저 그런 동창들과 술에 거하게 취한 상태에서 찾아든 사창가에서,
태어 나 처음으로 마주한 몸 파는 여자의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알몸 앞에서 긴장하여 성기를 축 늘어뜨린 채 엉거주춤 서있던 사내에게 다가 온 여자가 씩 웃으며 직업적으로 능란한 손길로 그의 풀 죽은 욕정을 불러일으킨 것과 같았다.
사내는 어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선임의 손길에 의해 팬티 속으로 사정을 하고야 말았다.
선임은 그 자세로 한동안 그의 성기가 풀 죽기를 기다렸다가 손을 빼내며 사내의 러닝셔츠에 손을 쓱 닦더니 다시 구린내 나는 입을 그의 귓가에 바짝 대고 속삭였다.
“새끼. 너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내일은 네가 나한테 해줘야 한다. 알겠지? 어쭈 복명복창 안 하지 새꺄. 뺑끼통 뒤로 집합하고 싶냐?”
사내는 무심결에 “넵. 이병 o o o 알겠습니다” 하고 군기 어린 복명복창을 했고 선임은 쿡쿡 웃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사내의 눈에서는 이유모를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고 질펀하니 젖은 팬티를 입은 채 서서히 아침 점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는 잠시 후 그 선임이 목을 매단 줄이 늘어진 상태로 혀를 길게 빼어 문 채 흙바닥에 눕혀 있는 것을 보았고 선임의 입과 코 사이로는 여전히 벌레떼들이 줄을 이어서 드나들고 있었다.
사내는 꿈속에서 낮게 읊조렸다. ‘개새끼....... 그러니까 넌 뒈져도 벌레한테 먹히는 거야.’
꿈속 어디선가 낮은 진동음이 들려왔고 사내는 서서히 꿈 밖의 세계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