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청음초 11화

청음초 11

첨단 기술

by 능선오름

11.

사내가 이리저리 굽어진 골목을 돌고 돌아서 도착 한 곳 은 전자부품 나부랭이들이 가득 쌓인 좁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이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나름 사연이 깃들어 있을 이름들로 가득한 전자상회들의 번잡한 간판.

그 밑으로 혹은 매직으로 혹은 아크릴판으로 이따금은 현란한 네온으로 쓰인 선전문구 들.

‘ 방범용 CC-TV, 비밀 카메라, 미니 녹음장치, 사생활 보호, 도청장치’

등등 뭔가 은밀함과 범죄스러운 문구들이 가득 나열된 상점들.


골목을 배회하는 사내에게 상점 앞에 나와 어슬렁거리는 고만고만한 사내들이 호객을 걸어왔다.

“아저씨, 뭐 찾아요. 우리 가게에 다 있어요! “

"우리 가게가 제일 쌉니다. 들어와서 구경하세요” 등등.

사내는 마치 사냥감을 만난 늑대 무리들처럼 달려드는 호객행위에 살짝 질려서,

아무 볼 일 없다는 듯 서두르는 걸음으로 골목을 지나쳤다.

막다른 골목이 가까운 곳에서 별다른 간판도 없어 보이는 낡은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현재 거의 볼 수 없을법한 빛바랜 알루미늄 새시에 유리창도 먼지가 쌓여 잘 보이지 않는 구석의 가게.

지금은 보기 어려운 알루미늄 미닫이를 열고 반쯤 가게에 고개를 디밀자,

머리가 하얗게 센 중늙은이가 굵은 테 안경을 끼고 무언가 잔뜩 쌓여 운신할 폭도 없어 보이는 두 평 남짓한 가게 안에서 고물상에나 있을 법 한 흑백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줄곧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내는 쭈뼛 거리며 낡은 새시 문을 왼쪽으로 밀었다.

문은 거칠게 반항하며 비명을 질렀다.


가게 주인은 고개를 돌려 사내에게로 얼굴을 향했다.

주인의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공허하였으며 사내라는 존재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것이 사내의 마음에 썩 좋았다.

“ 뭐 찾으시우?”

가게 주인이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저……. 요즘에 벽이나 문에 붙여서 건너편 소리를 확대해 주는 장치가 있다고 들어서요, 혹시 그런 게 있을까요?”

사내는 그다지 필요한 건 아니라는 듯 최대한 무심해 보이려 애를 쓰며 최대한 무미건조한 어투로 물어보았다.

“아, 벽에 붙여 쓰는 도청기를 말씀하시나?”

주인은 라면 한 봉지를 주문받은 편의점 주인처럼 덤덤한 투로 거꾸로 물어왔다.

사내는 움찔 화들짝 당황하며

“ 어……. 저기……그게 도청은 아니 구요, 뭐 꼭 들어야 할 소리가 있어서요.”

사내의 더듬거리는 답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게 주인은,

뭔지 모를 박스들이 잔뜩 쌓여있는 더미를 뒤지더니 작고 먼지가 솜털처럼 묻어나는 작은 박스를 솎아 내었다.

“무선으로 할 거유? 아님 유선으로?”

주인은 박스에 묻은 먼지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며 사내에게 물었다.

“ 아니. 저 뭐 그냥 벽에 붙여서 쓰는 거니 유선이면 될 거 같은데요.

아주 고성능을 원하는 거 아니고……. 헤드폰으로 들을 수 있으면.”


사내는 학창 시절 가방검사 시간에 숨겨놓은 담배를 들킨 것처럼 우물쭈물 대답을 했고,

주인은 예의 그 무심해 보이는 시선을 두터운 뿔테 안경 너머로 던지며 자문자답을 했다.

“ 그러니까, 돈이 많이 들면 안 된다는 얘기고……. 전원은 아답타로 연결이 되는 거면 되겠네.

그리고 헤드폰이야 그냥 저렴한 이어폰으로 써도 될 거고…….

뭐 이십만 원 대 정도 해주면 될까요? 삼십만 원대 면 음질 더 낫고…….

좀 더 쓰면 벽 저쪽 트림 소리까지 다 들리니까.”

자문자답하며 가게 주인은 이어셋 박스를 꺼내어 미리 꺼내 둔 박스 옆에 올려놓고 먼저 꺼내놓은 박스를 열었다.


내용물은 의외로 볼 품 없었다.

마치 학생 시절 접하던 광석라디오 조립 키트처럼 회로기판에 알 수 없는 전자 부속들이 배열되어 있고,

기판에 연결된 작은 스피커 같은 게 붙어 있었으며 기판 끄트머리에 헤드폰 잭이 노출되어 있었다.

사내는 이 물건이 맞는가 싶어 눈을 끔뻑거리며 한참 들여다보다가 가게 주인을 바라보았다.

“왜, 볼품없어 보이셔? 이 양반 영화를 너무 봤구먼. 뭐 이거 간단해요.

이 스피커를 테이프 루다 벽에 붙이고 전원 연결하면 벽 건너 쪽 소리가 여기 회로 루다가 증폭이 되면서 헤드폰으로 들으면 소리가 짱짱하게 들린다 이거지.

고가 라두 어차피 이 시스템은 똑같은데 다만 증폭 성능이 더 좋아지고 잡음 제거 회로가 추가된다는 거 말곤 같아요. 이 가격에 그 정도 성능 이면 죽이는 거지.”


가게 주인은 007 영화의 비밀 무기 제작자라도 되는 듯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갑자기 수다를 늘어놓았고,

사내는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어 세었다.

만 원짜리, 오천 원짜리, 천 원짜리. 한참을 세어 본 후 사내가 이십만 원을 세어 주인에게 건네고 나자 사내의 손에는 천 원짜리 몇 장만이 남았다.

가게 주인은 사내가 내민 돈과 사내의 손에 남은 구겨진 지폐 몇 장을 번갈아 보다가 사내에게 다시 물었다. “카드로는 안 하시고? 그럼 현금영수증 하실 건가?”

사내는 신용불량자가 된 이후로 카드를 만들 수가 없었다.

“아니요……. 그냥 주세요. "

가게 주인은 이십만 원에서 이천 원을 빼서 사내에게 돌려주었다.

“우리야 뭐 카드 안 하면 좋으니까. 깎아드릴게. 가서 잘 사용해 봐요 ”

가게 주인의 모호한 미소를 뒤로 하고 사내는 서둘러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부품들을 낚아채듯 챙겨서 골목을 빠져나왔다.


오후 해는 빨리도 지고 있었다.

사내의 뜬금없는 쇼핑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계란 판처럼 올록볼록한 스펀지 롤을 사고,

청테이프를 몇 개 사고 나서야 사내는 다시 전철을 타고 자신의 둥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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