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
15.
사내는 여느 밤처럼 서서히 렘수면에서 깨어났다.
귓속으로는 303호 여자의 흐느낌이 귀곡성처럼 계속 들려오고,
알람시계는 어둠 속에서 주황빛으로 두시 오십 분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사내는 뻐근한 몸을 조심스레 일으켜 매트리스에 걸터앉았다.
어두운 실내는 생경한 냄새들로 가득하였으며,
사내는 그것이 자신이 붙여놓은 스펀지와 바닥에 깔아놓은 우레탄 폼 때문 인 것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진 않았다.
사내는 어둠 속에 수척한 몸을 옹송그린 채 앉아서 청각에 모든 신경을 기울였다.
신기하게도 어차피 어두컴컴한 어둠 속임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청신경에 집중을 하면 미세한 소리들이 더 잘 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였다.
여자는 한참을 흐느끼다가 코를 팽하니 푸는 것 같았다.
그리고 뭔가를 마시는 꿀꺽이는 소리.
사내는 자신이 잠든 사이에 여자가 또 자살을 시도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새벽 깊은 시각에 홀로 침대에 앉아 흐느끼는 그녀의 슬픔에 가슴 한 모퉁이가 저릿한 둔통을 느꼈다.
돌이켜 보면 사내가 세상이라는 곳에서 사회생활이란 걸 시작한 이후로,
누군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껴 본 기억이란 맹세코 없었다.
사내는 자신의 이런 알 수 없는 마음이 신기하기도, 두렵기도 하였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것처럼 공유한다는 것.
그게 의미하는 게 무엇일지 더 생각을 발전시키기도 두려웠고,
그 공유하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남루하고도 미래를 바라볼 수 없는 처지가 더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아닌지 두려워졌다.
물론,
사실상 더 떨어질 나락이란 게 존재하는지 사내 스스로 의문은 들었지만.
그럼에도 이어 셋을 통하여 사내의 고막을 두드리는 여자의 흐느낌은 사내에겐 천둥소리처럼 들려와서,
가슴 한편 둔통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사내는 잠시 이어 셋을 귀에서 떼어내고 까치발을 들어 은밀한 몸짓으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바닥에 깔린 우레탄 폼이 푹신푹신 하니 밟히는 것 이 생경한 느낌이었다.
거실은 늘 그랬듯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으로 온통 엷은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고,
어둠 속에 낡은 싱크대와 녹슬어 있는 고물 냉장고가 어슴푸레 한 빛을 받아 사내를 지켜보듯 서있었다.
마치 ‘씬 시티’라는 미국 영화에 나오는 그로테스크 한 장면 들을 통째로 옮겨 놓은 것처럼.
사내는 냉장고를 열어 조금 차가운 녹물 맛 나는 물을 마시고 조심스레 냉장고 문을 닫고는 어둠 속에서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다시 매트리스로 돌아와서 끊어진 혈관처럼 늘어져 있는 이어 셋을 양귀에 틀어넣었다.
잠시 침묵만이 가득하여 혹시 고장이 났나 하는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래. 나갈 거야. 안 나가는 게 아니라 몸이 아팠다고요.
내일부터 나갈 거니까……. 너무 채근하지 말아.
난들 돈 벌어야지 왜 그러겠어. 응. 응? 아니야 다른 클럽을 알아본 거 아니라고.
진짜야. 알았으니까 내일 보자고요. 응. 알겠어. 미안해요.”
그녀가 서둘러 전화를 끊고 다시 코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지는 긴 한숨. 그리고 탄식.
“먹고사는 게 뭐라고…….”
사내는 그녀의 새벽 통화를 듣고 몇 가지를 떠올렸다.
그녀는 새벽까지 일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직장은 ‘클럽’이라고 불린다.
아마도 여기서 클럽이라는 단어는 술집으로 불리는 그런 계통 일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몸을 파는 직업 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젯밤 사건의 여파로 연 이틀을 결근한 것이다.
그녀는 ‘일’을 하면서 만난 누군가와 사귀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상대방은 단지 가벼운 연애 혹은 가벼운 욕망을 털어내려 그녀에게 접근하였을 것이고,
그녀는 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하였을 것이며 그 결과가 어제의 그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꽤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이 늦은 시각에 전화를 해서 출근을 채근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먹고살기 위하여 싫지만 그 직장을 나가야 한다.
사내 자신이,
자기 이름도 쓸 수 없어 타인의 명의로 일당벌이를 나가서 죽도록 박스와 씨름을 하고,
예전 직장 급여의 반의 반 정도도 못 받으며 몸을 써야 하 듯이 그녀 또한 그렇게 몸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몸을 어젯밤 그녀는 스스로 버리려고 하였었다.
그게 단지 깨어진 사랑 때문 일지,
아니면 스스로 느낀 비루한 삶에 대한 미련 없음이었을지 사내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중요한 건 그녀는 사내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물리적으로 가깝게 부딪혔던 사람이며
– 그것도 지나치게 가깝게 –
그로 인하여 살아나게 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깨어났을 때 사내에게 원망을 하였었을지도 몰랐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무 관계도 없는 사내가 느닷없이 뛰어들어서,
어쩌면 그녀의 운명이었을지도 모르는 사건에 개입하여 뜬금없는 인명구조를 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내는 그게 어떻든 그녀가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었다.
어떻든 그녀는 사내 인생에서 최초로 감정이입이 되는 사람이었고 사내가 ‘살려 낸’ 사람이었다.
그 이유 만으로도 사내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이게 불법이고 뭐고 따위는 아랑곳없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청음초 임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