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사내가 빌라로 돌아온 것 은 무탈한 평상시와 같은 저녁 아홉 시 즈음이었다.
그날따라 상차 차량이 오후에 몰려들어 거의 녹초가 되도록 박스를 나르고 싣고를 반복했던 사내는,
쉰 파김치 같이 늘어진 육신을 끌고 삼각 김밥과 사발 면과 맥주캔을 사기 위하여 빌라로 향한 가파른 언덕길을 꾸역꾸역 올라왔다.
한편 으로는 충분할 정도로 지친 육신이었지만 그날 퇴근길은 알지 못할 활력에 싸여 있었다.
평상시 사내의 퇴근 모습은 흡사 '매혈'이라도 하고 나온 사람처럼 핏기 없는 모습이었으니까.
가능했다면 아마 물류센터에 기숙시설이 있었다면 아예 들어앉아 더 먼 이동 같은 걸 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날의 사내는 마치 자신의 은신처에 먼 데서 온 반가운 손님이라도 있는 듯 바쁜 걸음으로 오르막을 올랐다.
한참 굽이진 오르막을 오르던 사내의 발길을 잡은 것 은 다름 아닌 목소리였다.
어딘가로부터 들려오는 알토의, 허스키한 여자 목소리.
“저기요……. 잠깐만요. 저 좀 보세요.…….”
303호 그녀였다.
사내는 처음 그 목소리가 자기를 향한 것인 줄 모르고,
바쁜 일이라도 있는 듯 허겁지겁 굽은 골목길을 돌아서 급히 발걸음을 재촉하던 중이다.
다닥다닥 싸구려 빌라들이 줄지어 서있는 골목 어귀에 두어 대 주차가 가능한 유일한 공터가 있었다.
그곳의 엎드린 듯 낮게 깔린 무허가 건물 귀퉁이에 매달린 동네슈퍼 앞을 지나치다,
재차 부름이 있고서야 슈퍼 앞 플라스틱 의자에 웅크리고 앉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슈퍼는 생필품 가게라기보다는 외형으로는 고물상이 어울릴 법 한 형상이었지만,
구색을 갖춘 답시고 가게 앞 손바닥만 한 공간에 때 묻은 파라솔과 낡은 테이블과 비바람에 허옇게 터버린 연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가게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가로등의 불빛 덕분에,
노상에 나와 있는 간이 테이블 위로는 주황색 나트륨 등이 쏟아지고 있는데 그녀가 사내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다.
순간 사내는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적인 놀램이 빠르게 걷던 호흡을 잠시 앗아가서 사내는 잠시 후 기침을 토하며,
마치 목이 졸려있던 날 밤 그녀가 그러하였듯 밭은기침을 쏟아 놓았다.
사내가 기침을 하는 동안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내를 바라보다가 예의 쿡쿡 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사내는 급히 멈추느라 헐떡거리는 다리 근육들을 진정하며 천천히 슈퍼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 앞에 서서 그녀의 얼굴을 슬쩍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허옇게 보풀이 일어난 원형 파라솔 탁자 위에 맥주 몇 캔과 오징어와 땅콩과 마요네즈 등속을 펼쳐 놓고 홀로 술을 마시고 있던 모양새다.
하루의 일과로 지쳐있던 사내의 배에서 염치없이 꾸르륵 소리가 났다.
멍하니 서 있는 사내에게 여자가 손짓을 했다.
“뭐해요. 부른 사람 무색하게. 이리 와 앉아 봐요.”
사내는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비칠 비칠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녀 옆에 놓인 파라솔 의자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녀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내에게 입을 열었다.
“ 아니 아저씨, 반대편 의자도 있는데 굳이 내 옆에? 그 정도로 친했나요, 우리?”
사내는 다시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그녀의 ‘앉으라. ' 는 말에 반쯤 넋이 나가서,
자기도 모르게 테이블을 앞에 둔 맞은편 자리에 앉았어야 마땅하는 것을 잊고 그녀 옆 빈 의자에 앉아 버린 것이다.
벌떡 일어나 허둥대며 테이블을 돌아가려는 사내의 발길에 앉아있던 의자가 차여 뒹굴었고,
당황한 사내는 의자를 다시 세우려다 걸려 넘어지고 다시 벌떡 일어나 맞은편 의자로 앉는데 이 모든 동작들이 마치 슬랩스틱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무척이나 진지한 짜임새였다.
모든 광경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던 여자는 다시 예의 그 웃음을 ‘쿡, 쿡 ’ 거리며 입가에 베어 물었다.
사내는 벌게진 얼굴이 그나마 음영이 드리워진 가로등 불빛에 유난스럽지 않다는 걸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사내의 육신만큼이나 빈약한 파라솔 의자에 반쯤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여자는 말없이 사내에게 맥주캔을 건넸고 사내 역시 말없이 맥주캔을 받아 쥐었다.
차가운 맥주캔을 감쌌던 그녀의 손가락과 사내의 손가락이 미미하게 스쳤다.
사내는 그게 못내 아쉬웠다.
캔을 받아 든 사내의 어정쩡한 모양새를 잠시 바라보던 여자가 이내 빨간 립스틱이 발려진 입을 열었다.
“저기요, 아저씨.
그 파라솔 의자 무너지지 않으니 좀 편하게 앉아 봐요.
그리고 목마르실 거 같은데 맥주캔 따서 마시고요.
왜 그렇게 불안한 자세로 웅크려요?
어디 눈총 주는 자리에만 있었어요?
나까지 불안하게…….”
여자는 말끝을 흘리며 들고 있던 맥주캔을 입에 붙여 한 모금 마셨다.
고개를 젖히는 그녀의 목선과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하얀 귓가가 묘하게 유혹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