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도나우 강
19.
사내는 눈을 떴다.
무엇이 사내의 선잠을 깨운 것 인지는 늘 그렇듯 명확하지 않았다.
평소 매일 밤 그러하였듯이 사내는 선잠을 설쳐가며 잠이 들었고 언제나 그렇듯 비슷한 시각에 눈을 떴다.
항상 그래 왔듯이 어둠 저편에서는 알람시계가 주황빛으로 지금이 새벽 세시 어름 이란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사내는 타는 듯한 갈증에 몸을 일으켰다.
아마도 퇴근 후 급하게 삼킨 라면들이,
그 짜디 짠 수프의 결정 들이 사내의 빈약한 잠을 긁어내어 깨운 것 일지 몰랐다.
사내는 이제는 거의 습관처럼 몸에 붙은 고요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켜 매트리스 밖으로 육신을 끌어내었다.
사내의 척추 마디마디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낡은 침대들이 그러하듯 사내의 낡은 육신 또한 온통 이음새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리라.
문득 사내는 생각했다.
‘왜, 육신은 라텍스 매트리스처럼 낡아도 그 부드러움을 유지하지 못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사내는 까치발로 거실을 향해 어둠 속을 유영하듯 나아갔다.
여전히 거실은 희미하게 배어든 가로등 불빛으로 기괴한 음영들이 가득하고,
사내는 어둠 속에서 낡은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냉장고 내부의 침침한 불빛이 거실을 가득 채웠고 그리 강하지 않은 냉기가 거실로 서서히 흘러나왔다.
사내는 며칠 전 받아놓은 물통을 꺼내어 녹슨 맛이 나는 냉수를 조금씩 마셨다.
그 녹 맛 나는 물맛은 여전히 익숙하기가 어려웠다.
냉장고 내부에서는 시금털털한 김치 냄새와 온갖 냄새들이 스멀스멀 배어 나왔다.
아마도 사내의 나이만큼 세월을 견디어내고,
그간 온갖 주인들을 전전한 끝에 자리 잡은 사내의 방에서,
더 이상 배를 채우는 일이라곤 보기 드물게 된 냉장고였다.
그리고 이젠 그 세월 간 뱃속에 품었던 온갖 음식물이 서서히 부패하여,
그 부패의 냄새를 내보내고 있는 것 일지 몰랐다.
사내는 누가 들을세라 망설이며 벌컥 거리지도 않는,
고요한 목 넘김으로 냉수를 마시고 다시 고요한 동작으로 냉장고 문을 닫았다.
어디선가 문을 여닫는 거친 마찰음이 간혹 들려오고,
창 밖에서는 여느 날처럼 누군가 치열한 목소리로 술주정을 하는 소리,
토악질하는 소리들이 비좁은 골목길에 더러운 공명을 일으키고 있다.
여느 밤과 똑같이 먼 데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 인지 아니면 어느 집이 불타오르고 있는 것 인지,
사내에겐 무관한 소음들이 평상시 밤처럼 사내의 고막을 두드리고 사라지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온갖 정체모를 밤의 불협화음 사이로 어딘가에서 고요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운 푸른 도나우.
이 시간,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라고 생각하며 사내는 다시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매트리스 모퉁이에 웅크리고 앉았다.
어둠 속에 칸막이벽으로부터 삐져나온 혈관처럼 하얀 이어 셋이 구불구불한 모양새로 흘러나와 있었다.
사내는 물끄러미 이어 셋을 바라보면서 웅크린 상체를 무릎 위에 올리고 한참 넋을 잃은 듯 바라만 보았다.
그날 밤, 여인을 따라 들어갔던 그날 이후로 사내는 더 이상 청음초 역할을 다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뭐라고 단언 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사내는 더 이상 303호 여자의 일상을 들여다보기가 두려워졌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 조차도 알 수 없는 다른 감정들이 자리 잡은 것 인지도 몰랐다.
분명한 것은 사내는 그날 밤 본의 아니게 여인의 깊은 곳,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본 것이었고 그곳은 사내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사내로서는 보지 말아야 할 것,
알지 말아야 할 것을 그녀와 본의 아니게 공유를 하게 된 상황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로 인하여 더 이상 사내가 그녀에게 해줄 것 도,
할 수 있는 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달아 버렸다고 할까.
지난 며칠 동안,
사내는 그가 살아오는 동안 고민하고 고통스러웠던 모든 기억들이 차라리 아름다웠다고 착각을 할 정도로 매일 밤잠을 설쳐가며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스스로에 혐오감을 느낄 지경에 이르렀었다.
오늘 밤 역시 사내는 고뇌에 싸인 채 잠이 들었고 다시 깨었다.
터져 나온 생선의 내장처럼 윤기 없이 늘어진 이어 셋의 줄이 희미한 어둠 속에서 사내를 고민에 빠지게 만든다.
사내는 망설임 끝에 며칠간 방치되었던 이어 셋을 귀에 다시 틀어넣었다.
이어 셋 저편 그녀의 공간은 음악소리로 가득하였다.
푸른 도나우 강.
사내가 거실에서 문득 들었던 그 음악이 이어 셋 안에 가득 찼다.
한동안 사내에게 익숙했던 음악들이 계속 연주되고 있었다.
사내가 클래식에 조예가 있어서는 아닌데 그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유일한 고전 음악.
푸른 도나우강이라는 곡은 사내가 오래전에 보았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 우주의 오디세이 ' 의 도입부에 흐르던 음악이다.
오직 어둠이 가득하던 화면에 우주선이 고요히 지나는 영상의 배경음악.
그다지 음악에 소양이 없던 사내가 알게 된 거의 유일한 곡이 그녀의 추레했던 방 가득 흐른다.
그리고 그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사내는 그녀가 슈퍼 앞 테이블에서 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난 때로 음악을 크게 올려 듣곤 해요. 그래야 다른 집들의 온갖 잡소리들이 안 들리니까.
근데 요즘은 새벽에 음악 크게 듣는다고 시비들을 걸어서……. 헤드폰을 끼고 잠들기도 하지만.
그건 불편해서 낮은 소리로 틀고 자곤 하지요.’ 하던.
사내는 한동안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매트리스에 웅크리고 옆으로 누워서 귓속으로 들리는 음악들을 속수무책으로 느끼며 서서히 옅은 잠에 다시 들어갔다.
그 이튿날 밤도 그다음 날 밤도 그녀의 방으로부터는 음악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매일 밤 음악들을 들으면서 사내는 이 음악들이 사내도 한 때 CD플레이어를 소유하고 있었을 때 유일하게 듣던 음반의 트랙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란 걸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시작하던 영화 배경곡들을 며칠간 반복으로 들으며 깨달은 것이었다.
그가 한때 갖고 있던 유일한 CD의 순서에 따라 곡들이 반복 플레이되는 것이다.
며칠간 내내, 사내가 퇴근하여 다시 이어 셋에 집중하던 내내, 계속 들려오던 반복되는 음악 소리.
사내에게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하였다.
사내는 이어 셋을 서둘러 빼고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걸 개의치 않고 빠른 걸음으로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현관문이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