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부적응자
16.
아침이 밝았다.
좁은 골목에는 여전히 아침의 부산스러움이 지난밤 버려진 쓰레기들처럼 난무하고,
아침시간이 돌아오긴 하였으나 날이 흐린 탓 인지 빌라의 입구에 나서도 길은 침침하게 우울한 잿빛으로 열려있었다.
사내는 이래저래 설친 잠 끄트머리를 털어내고 다시 자신의 생업이 걸린 장소를 가기 위하여 무거운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빌라 앞 쓰레기들이 몰려있는 곳을 피해 발을 옮기다 문득 사내는 3층을 올려 보았다.
순간 사내는 숨이 턱 막혀왔다.
303호의 먼지로 얼룩진 창문이 열려 있었고,
그곳엔 여자가 일 년 전 사내가 처음으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팔을 창턱에 걸치고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여자는 마치 먼 산을 바라보는 듯한 모양새로 고개를 살짝 올린 채였는데,
골목의 폭 이라야 불과 차 한 대 지나갈 정도로도 힘겨운 비좁은 공간.
결국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곳 은 맞은 편의 엇비슷하게 낡은 빌라의 3층이거나 4층 창문 일 것이었다.
여자는 길게 담배연기를 한숨처럼 뱉어내며 담배를 손끝으로 탁탁 능숙하게 털었다.
타버린 담뱃재가 허공에 잿빛 싸락눈처럼 흩날렸다.
사내는 고개를 쳐든 여자의 특선과 목선이 참 곱다고 생각했다.
흐린 아침볕이 미미하게 스며든 골목이지만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빛이 나 보였고,
담뱃재를 터는 손가락이 가늘고 섬세했다.
손끝에 발려진 빨간색 매니큐어가 선명하게 사내의 눈에 들어올 때 그녀는 시선을 느낀 듯 문득 고개를 아래로 향하였다.
사내는 흠칫 놀라며 괜스레 낡은 점퍼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었다.
그리고 고개와 허리를 빳빳하게 펴 보려고 애를 썼다.
여자는 아직 어둠이 흐릿한 골목 안에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못 알아본 듯,
자세히 눈을 치켜뜨고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게 누구인지 깨달았던 모양이었다.
여자는 사내의 얼굴에 피식 웃음을 보이곤 이내 창문 안으로 사라졌다.
사내의 가슴이 다시 쿵쾅 거리며 뛰었다.
그게 어떤 의미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미소가 사내의 낡은 가슴을 두드려 온 것이니까.
사내는 얼굴을 붉히며 누가 보진 않았는지 휘휘 주변을 둘러보곤 다시 당황스러운 걸음을 옮겨 골목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내의 뇌리로 순간
‘ 아. 어제 입었던 재킷을 입고 나오는 건데…….’라는 후회가 떠올랐다.
그런 마음도 잠시뿐, 아침 일찍이 여자의 미소
– 그게 어이없어하는 웃음 일지 아니면 그냥 인상을 찌푸린 것 인지 조차도 분명치 않을 만큼 모호한 게 사실이지만 –
를 만난 사내의 마음은 소풍 길을 나선 어린아이 마냥 들뜨고 벅차오르는 것이었다.
물론 사내의 육신은 이미 중늙은이로 접어든 볼품없는 모양새 이긴 하였지만.
번쩍거리는 통근버스에 올라서서 사내는 새삼스러운 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입 벌리고 졸거나 혹은 사내처럼 손잡이에 굴비 엮듯 매달려,
차가 좌우로 꺾일 때마다 신음을 흘리며 좌우로 앞뒤로 헤드뱅잉을 하는 군상들 사이에 ‘덤’처럼 끼어서도 사내의 마음은 아주 조금은 행복 비슷한 감정이 맴돌았다.
돌이켜 보면 그의 생애에 있어서 의미가 되어 본 여자라곤 아무도 없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숫기 없고 나서기 싫어하는 사내의 대학 생활은 그 또한 무미건조의 연속이었다.
신입생 시절 단체 미팅에 두어 번 불려 나갔다가 분위기 가라앉히기 일쑤였던 그를,
동기들이 더 이상 부르지 않게 된 건 당연한 결과론이다.
그날 이후로 자연스럽게 이성을 만날 기회조차 없어졌던 그에게는 이렇다 할 이성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름 호황이었던 경기를 타서 공채가 많았던 시기에 중견기업을 우연히 운 좋게 입사하였을 때가 아마도 사내에겐 가장 전성기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튀는 모습은 아니었으나 정사원으로 셔츠를 입고 출퇴근할 때에는,
어쩌면 회사에서 어린 여직원들에겐 그 나름의 호감을 주었을 수 도 있었으련만.
당장 야근과 격무에 시달리던 그때도 사내에겐 별다른 이성을 만날 기회 같은 게 없기도 하였고,
숫기 없는 사내로서는 사실 이성 자체가 두렵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물류센터에 도착한 사내는 항공기 격납고처럼 거창한 물류센터 아래,
오른편으로 돌아서 들어가는 작업자 전용 출입구를 향해 개미떼처럼 무리를 지은 사람들 뒤에 바짝 붙어 걸어 들어갔다.
거대하며 인간적인 느낌을 형태와 색채로 강하게 거부하는.
삭막한 잿빛 건물 하단에 좁다할게 입을 벌린 시커먼 직사각형 구멍 속으로 사람들이 거침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흐린 아침이었다.
이래저래 인간들은 늘 사각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