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by 능선오름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거대한 대기는 내 책을 펼쳤다 또다시 닫는다.

가루가 된 파도는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단배들이 먹이를 찾아다니는 이 잠잠한 지붕을!

폴 발레리 시의 한 구절이 사무치도록 와닿는 날이다.

백 년 전 프랑스 어느 곳에선가 떠올렸을 시구가 세월을 넘겨짚어 내게로 온전히 다가왔다.

다시 봄이다.

만사휴의 萬事休矣이라는 네 글자에 얽매인 시간이 있다.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저 내 마음속 스스로 구속이었을 게다.

그래도 물리적인 시간은 흘렀고, 시간은 모든 것을 여과하여 투명하게 만든다.

부질없을 미몽에 빠져 근 이 년간 세차 한 번을 않던 차를 전문가에게 맡겨 닦다.

오랜 땟자국을 벗겨낸 차는 주인인 내가 못 알아볼 지경으로 멀겋다.

한때 신체의 일부분처럼 매달렸던 자전거는 먼지가 쌓여있고,

한동안 탄탄하여 남몰래 슬며시 확인하던 허벅지는 비루먹은 망아지 다리처럼 말랐다.

해묵은 자전거를 꺼내어 다시 닦아본다.

올봄도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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