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당신들은 타락할 대로 타락한 이 도시를 구원하려는 잔다르크 정도?로 생각하는 걸까.
아. 그건 아니겠네. 잔 다르크는 가톨릭이지.
역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큰 목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노숙자 남자 둘에 여자 하나가 커다란 비닐봉지를 모두 함께 움켜쥐고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다.
얼핏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니 대사가 이렇다.
- 뭐시여! 이 깡통들 내가 모은 거라고!
- 아니, 대체 버린 깡통에 무슨 주인이 있어! 먼저 가져가믄 임자아녀?
- 뭔 개소리야! 이건 내가 그동안 모아놓은 거라니까!
- 어허~ 자네가 좀 양보혀. 어차피 따로따로 모아놓은 건데 뭐 그렇게까지.
듣자니 광장 분리수거 터에 모인 알루미늄 캔을 가져가 팔으려고 하는데, 세 명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다투는 형세다.
알루미늄 빈캔의 무게는 대략 18g. 원래 13~17g으로 나오지만 폐깡통의 경우 안에 액체가 남아있을 수 있어서 대충 18g이다.
그리고 폐 알루미늄캔의 고철가격은 지역마다 다르지만 2024년 6월 기준 kg당 1776.5 원. 비닐봉지에 들어있던 캔의 개수를 100개라고 하면 18 g×100개= 1.8kg × 1776.5 = 3197.7원 = 소주 한 병 1400원? (잘 모른다) 이면 두 병 정도 살 수 있는 금액일 것이다.
왜 하필 기준이 소주냐 하면, 어느 곳이듯 역전에 모인 노숙인들은 늘 술에 절어있는 게 다반사라 그렇게 계산했다.
내가 계산을 머릿속에서 돌리는 사이에 노숙녀가 노숙남을 밀었는지 ' 아이고나 죽네 ' 하며 노숙남이 아스팔트 위에 나뒹굴고 그 서슬에도 비닐 끄트머리를 잡고 있어서 봉투가 찢기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빈깡통들이 나뒹군다.
아이는 그런 어른들이 다투는 풍경을 처음 봐서 충격을 받았나 싶다.
대체 왜 쓰레기를 서로 자기 것이라고 싸우지? 우리 집에서는 모아서 버리기 바쁜데? 했겠지.
아이가 아는 세상에서 그런 직접적인 폭력이란 반에서 말썽쟁이들이 일으키는 사소한 시비.
그게 아니면 영화에나 나오는 현실감 없이 너무나 거대한 전쟁. 이게 전부였으니.
아이는 일찍이 유튜브라는 천하에 고약한 ‘사이비 교리’에 의해서 노동을 해야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달았고, 모든 동물은 포식자와 피포식자로 나뉘어 있음을 알았고, 노소를 막론하고 결국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주 일찌감치 깨달아버려서 어느 날 아이가 출가를 하겠다고 한 대도 놀랄 일은 아닌데.
정작 아이가 노숙자들의 다툼에서 그 이상하고도 추악한 인간의 민낯을 봐버린 게 충격이었던 듯 며칠간 그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답변이란, 인간은 자신의 배가 부르고 안정적이어야 타인을 배려하고 도울 수 있다 거나, 저 사람들도 태어나서부터 노숙자는 아닐 것이다, 인생에서 여러 가지 계기가 있어서 저렇게 거리로 내몰렸겠지, 하지만 조금 자유를 억제한다 해도 재활기관들이 있고 하니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면 아마 노숙은 벗어날 텐데, 그냥 길에서 폐기물 주워 팔고 그걸로 술 먹고 흡연장에서 꽁초 찾아서 담배 피우는 거리의 인생을 선택한 것은 본인 선택의 문제,라고 교과서적인 답을 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노숙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선입견 혹은 판단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내 경험으로는 그 직관도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내가 어렵고 힘들며 모든 부분에서 바닥을 치고 있었을 때 그들의 무리를 보면 어느 정도 이해를 했었다.
오죽했으면... 하는 공감과 이해였다.
그러다 바닥을 치고 벗어나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을 때는 왜 저들은 아예 벗어날 시도조차 않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어느 정도 저들이 ‘자의’에 의해서 저렇게 지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다 운 좋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늘 운전하고 지날 때 눈에 걸리던 ‘노숙인 무료식당’에 쌀과 라면과 지원금을 후원하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철저하게 무신론자인 나이지만, 뭔가 어려운 이들을 도움으로 일종의 액 막음? 같은 마음이 나도 모르게 무의식 저편에 감춰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마음은 아니고, 그저 운이 좋아서 조금 여유가 생겼으니 얼마라도 세상에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배식을 받기 위해 늘어선 사람들의 시선에서 악의를 느꼈었다.
무료 식사 제공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현장에서 움직이는 종교인 들이었는데, 그들이 쌀이나 라면박스 옮기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면 그걸 가져온 나에 대해서 증오 어린 시선이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한두 번 겪은 이후로는 그냥 배달을 통해 보냈었다,.
일종의 자격지심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들은 나를 ‘위선자’로 보았을지는 모른다.
석가모니가 생로병사를 보고 충격을 받아 자신의 가업, 지위, 가족 모두를 버리고 출가한 것을 보면 인간은 알 수 없는 존재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믿고 믿으려 노력하는 존재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그것이 원시적 샤먼이거나 애니미즘이거나 기독교 이거나 힌두교, 불교이건 어떤 형태로든 종교를 만들고 그것을 믿는다.
그리고 내가 아는 얇고 좁은 지식의 한도 내에서는 역사 어디에고 실제로 현실적인 ‘신의 도래’를 목격한 기록은 없다.
만약 있었다면, 늘 대전역 한편에서 벌어지는 노숙인들의 치열한 바닥싸움과,
그 반대편 광장에서 온종일 찬송을 귀청 터지게 틀어놓곤 앞에 앉은 청중이라곤 그 시설에서 끌려 나온 기력 없는 노인들과 정신지체 장애인들.
한 겨울에 입술이 시퍼렇게 변했는데도 눈보라를 맞으며 CCM에 맞춰 빨갛게 변한 손으로 박수를 치는 그런 장소에도 현신을 하는 걸 본 적 없었으니.
종교적으로 아이에게 납득을 시킬 방법이 없다.
아이에게 종교란, 늘 하굣길에 지나가는 할머니인척 하고 있다가 손에 아주 작은 사탕봉지를 쥐어주며 와서 예배하면 더 맛난 거 준다고 유혹하는 그런 것이 전부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