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라떼는 말이야 6
오르지 못할 산은 안 올라도 괜찮아
오르지 못할 산은 안 올라도 괜찮다
넌 직업 산악인이 아니잖아?
아빠가 한창 자라던 시절에는 ‘ 개천의 용 증후군’이라는 게 있었어.
어, 물론 공식용어가 아니라 아빠 멋대로 지어 부르는 용어야.
이건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에서 비롯된 말인데,
한마디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눈에 띄게 탁월한 사람이 나타난다는. 그런 뜻이야.
즉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이겨내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이른바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고 그렇게 되라고 종용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지.
속담이란 생각보다 내성이 강해서, 그 정확한 의미와는 무관하게 인간사에 영향을 미쳐.
인구밀도가 높고 소위 ‘성공’이라 부를만한 자리가 비좁은 사회에서,
그 속담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채찍질하게 만들고
'용'이 되지 못한 다수의 사람은 평생 박탈감 내지는 열등감을 숨기고 살아가게 되지.
또 한편으로는 ‘개천’ 출신인데 내가 어떻게 ‘용’이 되나? 하는 반항심을 가지기도 해.
그런데 생각해보면 ‘성공’이라는 잣대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라때는, 개천에서 용이 되기 위한 조건은 대개 공부의 문제였거든.
대다수가 어렵게 살던 시절이고,
오를 수 있는 자리들도 ‘성공’에 근접하려면 지금은 폐지된 사법고시를 통해서 법관이 되거나,
의대생이 되어 의사가 되거나 다른 공부를 통해 고위공무원이 되거나……. 등등 이었었어.
그러다가 산업 중심사회로 변하면서,
대기업에 들어가서 최고위 임원 자리에 오르는 게 또 다른 방향의 ‘성공’이 되기도 했었지.
불과 얼마 전까지도 지방 도시에 가게 되면,
마을 입구에 떡하니 ‘00 씨 아들 00 이 00 회사 부장 진급 축하’ 이런 현수막이 걸려있고 그랬다니까.
현재도 대학 입시 끝나고 학교 교문에 ‘00대 0명, XX대 0명 입학 축하’
이런 현수막이 붙어있는 게 현실이야.
네 세대에도 이런 흐름이 크게 바뀔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우리나라는 인구 밀집도도 높고 보편적으로 직업이나 성공에 대한 강박감이 크니까 말이야.
이런 말을 하는 나부터도 어려서 대학이 뭔지도 잘 모르는 네게 이왕이면 멀지 않은 대학교,
예를 들자면 서울대……. 식의 말도 안 되는 조기 세뇌? 를 시키기도 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하곤 싶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나라는 아직 학력우대 사회이고,
사실상 세상에서 돈 좀 벌고 권력 좀 있다는 자리는 대체로 학교 순위와 무관하진 않으니.
하지만 내 진짜 생각은 모두가 ‘용’ 일 필요가 없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세상은 정말 용판이 아니라 개판이 될 거라는 생각이야.
성공의 기준이 많이 달라졌고,
중요한 건 타인들 기준의 성공이 내가 생각하는 ‘성공’과 같냐가 문제인 거야.
개천에선 송사리나 피라미가 나는 게 맞아.
‘용’이라는 존재도 하지 않는 상상 속 동물을 들먹이며 일종의 채찍으로 쓰는 게 잘못된 거지.
개천에서 잘 사는 송사리가 왜 불행할 거로 생각하지?
왜 모두가 ‘표준’ 몸매와 ‘표준’으로 잘생긴 용모가 되어야 하지?
모두가 기본으로 영어를 해야 하고 옵션으로 자격증들을 수두룩하게 따야 하지?
그 모든 시간과 노력을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것에 온전히 몰입한다면 훨씬 더 좋은 결과가 있을지도 모를 일인데.
그러니 딸아.
진정으로 네가 원한 게 아니라면 모든 사람이 맹목적으로 오르고자 하는 산을 오를 필요는 없어.
그리고 산에 오르기 시작하면 왜 모두 산꼭대기에 올라야 하지? 어차피 내려올 건데.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산에 안 올라도 갈 곳은 많아.
대부분 사람들이 이유도 모르고 진심으로 자신이 원하는지조차도 모르는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가고 있다면,
너는 거기서 한 번은 잠시 멈춰 서서 이게 내가 원하는 것인지 볼 필요가 있어,
물론, 정말로 내가 뭘 하고픈 것도 가고픈 길도 딱히 없다면 보편적 사람들이 걷는 길을 따라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많이 이들이 선택하거나 걷는 길은 최소한의 검증이 된 길이니까.
그러므로 딸아.
너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숙제는,
네가 걷고 싶은 길. 가고 싶은 산이 어디인가를 먼저 찾는 거야.
어려운 숙제를 줘서 미안해.
아빠는 다만,
네가 아빠의 시대처럼 '개천의 용' 따위가 되려고 헛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너의 꿈, 너의 희망은 원하는 대로 가지기를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