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바퀴 위의 단상

승자는 없다

by 능선오름

승자는 없다


4월 3일이다.

뉴스 머리에 77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도식이 있다고 짧게 나온 것을 보았다.

사실 제주 4.3 참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못했다.

내 또래들이 그러하고, 요즘도 공교육에서 4.3에 대해 어떤 가르침을 주는지는 모른다.

하고 있는 직업 때문에 제주도를 꽤 많이 오갔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제주도를 오간 항공마일리지 만으로 대한항공 모닝캄 회원이 될 정도였으니까.

오래전에 제주 출장을 앞두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4월 3일은 가능하면 가지 말라고 하였다.

왜냐고 물으니, 4월 3일은 제주도 전체가 거의 ‘제사’ 지내는 분위기라 업무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희미하게 알게 된 제주 4.3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토착 제주도민 셋 중에 한 명은 직접, 간접적으로 4.3 사건으로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1940년대 제주도민의 1/3이 사망한 건 아니라 해도, 직간접으로 모두 연관이 있다는 것은 제주토착민 중에서 해당 사건의 여파에 휘말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는 이야기니까.


궁금했다.

당시는 6.25 전쟁이 있기도 이전의 일이다.

게다가 아직 독립 후 정부수립이 제대로 이뤄지지도 않았고, 대통령도 없었던 상태에서 미군정의 통치를 받던 시기다.

국민 대다수는 공산주의가 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었고, 이데올로기보다는 먹고사는 문제에 더 심각했었던 시기였었다.

미군정 하에서 미군은 그들이 당시 통치하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통치이념과 무력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을 다스리던 시기였다.

4.3 보다는 시기적으로 최근에 가까운 베트남전 당시 베트남의 상황을 생각하면 비슷할 것이다.

이념적인 문제로 남부 베트남에 정권을 세워 지원하며 자국의 영향력을 발휘하던 미국.

그들에겐 베트남의 남북 분쟁은 남의 나라 일일뿐 자국의 영향을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느냐가 주된 관점이었기 때문에 베트남 국민들의 인권이나 인류애적인 마음 같은 것은 애초 없었다.

4.3 당시 제주도도 마찬가지였다.

당파들이 있었지만, 그 당파들이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를 제대로 이해한 도민들은 거의 없었다.

그저 밥 한 끼 잘 먹게 해 준다는 말에 당원이 되거나, 제주 특유의 ‘괸당문화’에 의해 파벌이 생기는 그런 형국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역사상 제주도는 중앙정부로부터 기나긴 수탈의 역사를 가진 섬이다.


고려시대에 삼별초가 제주에 도망가서 제주도를 장악하고 고려 중앙정부에 맞서 싸우느라 제주도민들은 또 다른 형태의 수탈을 당했었다.

‘원나라에 항거하기 위해’라곤 하지만 결국 고려 중앙정부의 정책에 반대해 무신정권을 지키려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에 다름 아니다.

조신시대에도 사형만 면한 죄인들을 귀양 보내는 곳이 제주도 아니었나.

제주에 파견된 목민관들은 도민들을 착취하여 중앙의 권력에 지속적인 진상을 해야 다시 내륙으로 돌아올 수 있는 구조였기에 도민들은 수탈을 당하는 입장 외에 방법이 없었다.

그런 형국인데 36년간 일본의 통치하에서 또 다른 형태의 수탈을 당했고,

그러다 해방이 되자마자 다시 또 미군의 군정을 받아야 했으니 제주도민의 처지에서는 지속적으로, 역사적으로 수탈자만 바뀌어 온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한 것이다.

현재까지도 그런 피해의식은 제주도민들의 무의식 깊숙이 자리 잡아서, 제주 토착민이 아닌 이주민들에 대해 ‘육지 것’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육지로부터 혜택을 받은 것은 미미하고, 육지에서 생긴 죄인들을 제주에 보내 죄인들의 수발까지 도맡아여야 하고, 태풍의 피해를 입건 어쨌건 위에서 정해진 진상품은 죽어라고 맞춰야 했었으니.

조선시대에는 200년간 제주도민이 육지에 나올 수도 없도록 ‘출륙금지령’이라는 법제도 있었다.

'제주(濟州)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유리(流離)하여 육지의 고을에 옮겨 사는 관계로 세 고을의 군액(軍額)이 감소하자, 비국이 도민(島民)의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조선왕조실록 인조 7년 8월 13일)

조선은 인조 7년인 1629년 결국 제주에 출륙금지령을 내리는 강력한 통제정책을 폈다.

국법으로 관청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다른 지역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막아놨고, 제주 사람들은 200년 가까이 섬 안에 갇혀 폐쇄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출륙금지령은 유배 온 왕족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인조 6년인 1628년 역모에 휘말려 죽은 선조의 일곱 번째 아들 인성 군(仁城君)의 가족들이 제주로 유배 왔다.

오랜 세월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인성 군의 다섯 아들 가운데 장남 이 길과 차남 이억, 사남 이 급이 제주 여인과 결혼해 자식을 낳았다.

인조 13년 이들의 유배지를 옮기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출륙금지령 때문에 처자식을 데리고 섬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후 사면돼 죄인 신분을 벗어나자 이들은 제주에 남아있는 처자식을 데려올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올렸지만,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이 청원을 받아들이려 해도 조정 대신들은 "제주의 인물이 육지로 나오는 것을 금한 것은 곧 조종조(祖宗朝)로부터 내려온 고칠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성상의 하교가 아무리 친족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더라도 결코 그 어미들까지 육지로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라 말하며 반대했다.

결국, 제주에서 얻은 자식들만 어머니 없이 제주를 떠나 한양의 아버지 곁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왕족과 혼인한 여성들의 발까지 묶어 놓았던 출륙금지령은 일반 백성들에겐 가혹하리만치 더 엄격했다.

조선은 혼인을 통한 여성의 이주를 막기 위해 제주 여성의 경우 육지 남자와 혼인하는 것까지 법으로 막았다.‘

연합뉴스 중 -


일본식민지를 벗어나면서 제주의 혼란함은 극에 달했고,

결국 1947년 3월 1일 경찰의 군중에 대한 무단 발포 사건으로 발단된 문제들이 미군정의 이데올로기 편향적 강경진압으로 시작되어 6.25 전쟁 기간을 포함하여 총 8년여에 걸쳐 경찰, 군, 서북청년단과 같은 극우세력과 남로당 산하 빨치산과의 전쟁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것이 4.3 의 비극이다.

명확한 것은, ’ 군대‘ 와 ’ 군대‘가 맞서 싸운 전쟁이 아니라 제각기의 이념과 정치적 목적을 가진 세력들이 민간인들을 내세워 뭐가 뭔지도 모를 상태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을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 빨갱이‘라고 제보하면 당사자와 가족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처형을 당하고, 그 보복으로 경찰이나 공무원이 납치되거나 살해되고 가족들도 보복을 받고.

복수가 복수를 낳고 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을 믿을 수 없는 생지옥으로 내몬 것이다.

서북청년단은 남북으로 국토가 분단되던 시점,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가 지배하던 시기에 평안도 쪽에서 남쪽으로 밀려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개중에 지주세력이었거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고, 개신교인들도 많았다.

북한의 무자비한 숙청에 떠밀려 할 수 없이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었고, 그런 배경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강력한 적대심과 복수심이 넘치는 세력들이었다.

이데올로기 이전에, 가진 것을 빼앗긴 자들의 분노가 더 컸었던 무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남쪽의 군정에서는 그들을 군인으로 받아들이거나 일종의 근거 없는 사법권을 대행하게 만들어 반대세력에 대하여 무자비한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집단으로 키웠었다.

그러니 제주와 같은 지역에서 그들은 마치 점령군처럼 무소불위의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래전에 우연히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제주 토박이 화가분을 만나 들은 얘기가 기억난다.

’ 아침에 등교할 때 보면 밭이나 운동장에 시체들을 쌓아놓았지. 아이들은 그런 걸 하도 자주 보니 관심도 없었어. 여기저기 들판이나 숲에 흩어진 탄피들을 주워서 놀곤 했지.‘

역사에서 비극을 만들어낸 당사자들은 사실 인류애 같은 것은 없다.

자신과 반대세력이 있다면 수단방법 안 가리고, 손가락질과 명령 만으로 비극을 만들어낼 뿐.

그들은 정작 나중에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저 ’ 역사‘라 부르는 거대한 격랑에 휘말려 떠내려가다 운 좋게 나무등걸이라도 붙잡아 생존하거나 아니면 격류에 휘감겨 깊이 침몰. 두 가지 경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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