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5월
소년이 온다
5월이 오면 어린이날, 어버이 말, 스승의 날 등등 조금은 부담스러운? 행사일이 있다.
그러다 5월 18일이 오면 마음이 몹시 무거워진다.
사실 나는 그날의 일들에 대해 간접적으로 들었던 것 외에는 알고 있지 못하다.
작가가 당시 희생자들의 가족들을 만나 전해 들은 이야기들을 구술하듯 담담하게 기술하였듯.
그리고 끝말에 본인의 어린 시절 드문드문 엿들었던 이야기들만큼 직설적이지 않은 간접경험으로 밖에 나도 알지 못한다.
고1 때, 엄연히 야간통행금지가 존엄하던 시절 12월 12일.
어디선가 먼 데서 총소리가 잇달아 들려오는 바람에 선잠을 깼고, 아버지는 엄숙한 얼굴로 누가 듣기라도 할세라 아버지 답지 않은 조용한 음성으로 그냥 조용히 자거라라고 하였다.
6.25 참전용사 이자 상이군인이기도 했던 아버지였지만, 그래서 총소리는 익숙하셨을 터이지만, 그래서 더 무표정한 얼굴로 그리 담담하게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까.
고1이지만 어린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나는 아버지가 괜찮다고 하시니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지 싶다.
그리고 날이 밝자 아버지가 출근을 안 하시고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이셨던 기억이 있다.
“계엄령‘이라고 했다.
그게 뭔진 모르지만 당장 학교에 가진 않았던지 어땠는지 그때의 기억은 희미하다.
서울에서도 종로, 명동 정도를 여행처럼 다녀본 것 외에는 변두리 산꼭대기에서 살면서 서울밖으로 벗어나본 적이 없었으니, 게다가 티브이도 없으니, 라디오에서 연신 나오는 뉴스들은 잘 모르지만 꽤나 살벌한 느낌이었고 학교의 교련시간에도 교련선생이 평소보다 곱절은 엄한 표정으로 입단속을 시키곤 했지만 정작 우리들은 뭘 입단속 해야 했는지도 몰랐다.
’ 광주‘ ’ 빨갱이‘ ’ 인민군‘ ’ 반란‘ 이런 단어들이 거의 매일 스치듯 슬쩍슬쩍 들려올 뿐이었다.
어쨌거나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박정희란 사람 외에는 없을 줄 알았는데 교실마다 붙어있던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없어지고 뭔가 소림사를 연상시키는 사람이 대통령 사진 자리로 갈아붙여진 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고2 때 광주출신의 학생이 한 명 전학을 왔었는데, 녀석은 사투리도 좀 심한 데다 자신이 광주에서 ’ 진짜‘ 총을 메고 다녔었고 실제로 사격도 해봤노라고, 늘 묵직한 고무덩이로 만들어진 소총모형을 들고 교련교육을 받던 우리에게 으스대곤 해서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 광주사태‘ 라 불리던 사건이 있었다는 건 알지만 당시 우리는 고1이었으니 그게 단순한 데모의 연장 정도로 생각을 했었기에,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 시기에 대해 내가 어렴풋하게 기억하던 것은,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얼마 후에 하굣길에 즐비하게 보이던 홍등불빛의, 늘씬한 누나들이 헐벗다시피 입곤 호객하던 가게들이 몽땅 문을 닫았다는 것. 그리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간들대며 건달들 흉내를 내던 동창 녀석들이 싹 없어졌었다는 기억은 있다.
그중 한 녀석을 고3 때 우연히 동네에서 마주쳤는데, 초등학교 때만 해도 짝꿍도 했던 녀석이라 건달짓 할 때도 나와는 그리 거리감이 없던 녀석이었는데 해실해실 웃으며 내게 다가와 아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 너 한참 안보이던데 어디 갔었냐?
내 물음에 녀석은 갑자기 우물쭈물하며 다시 실실거리더니
어, 그냥 어디 갔다 왔어.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라며 어울리지도 않는 소리를 하며 사라졌다.
나중에 주변에서 듣기에 녀석이 ’ 삼청교육대‘에 끌려갔었다는 소문은 들었다.
당시 우리가 아는 삼청교육대란, 이웃집에서 티브이를 보면 뉴스 시간에 군복을 입은 사내들이 전봇대 같은 것을 들었다 놨다 하는 곳 정도. 불량배를 비롯해서 ’ 사회에 암적인 존재‘ 들을 강제로 데려가서 정신교육을 하는 곳이라는 방송뉴스 정도여서 녀석이 그 정도로 암적인 존재였나? 쯤 생각으로 끝났었다.
난생처음 광주라는 곳을 갔던 이유는 그곳에 임관장교들의 전투주특기를 교육하는 기관인 상무대가 있어서였다.
빛나는 소위 계급장을 단 교육생들은 사관학교 때처럼 내무반을 배정받고 그곳에서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토, 일요일이 되면 외박을 나가곤 했었다.
그때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이용하면서 느낀 것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시민들은 군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외출한 우리들의 군복과 군복 가슴에 자랑스럽게 붙은 공수휘장을 보면 안색들이 좋지 않았었다.
버스를 타면 뒤에 우글우글한 학생들 중에선 거의 들릴 정도로 ’ 공수‘ ’ 군바리들‘ ’ 개새끼들‘ 이런 속삭임이 들리곤 했지만 혈기가 방장한 소위들도 애써 참으며 노려보는 정도의 대응만 했었다.
외박신고를 할 때마다 구대장들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 교육‘을 했기 때문이다.
교육을 받는 신임소위 대부분은 왜 그래야 하는지, 대체 왜 우리가 시민에게 그렇게 적개심의 대상이 되는지는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나마 전남 지역 출신의 동기들 정도만 굳은 표정으로 꽉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상무대에서 외박을 나갈 때면 우리는 일반 정복에 가까운 근무복이라는 것을 입고 외출을 하는데, 5월이 되자 모두 개인사복을 준비해서 사복외박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당연히, 소위 계급장을 단지 얼마 안 된 신임소위들은 반발이 심했었다.
우리가 이 계급장을 달려고 얼마나 땀을 흘리고 굴렀는데, 자랑스러운 군복을 입지 못하고 어정쩡한 사복을 입고 나가라니.
그러나 명령은 명령.
어느새 군복에 익숙해진 얼굴들이 갑자기 알록달록 사복을 입고 외박신고를 하고 나서는 모양새는 영락없는 방위병 같았다.
방위병 출신들을 무시하는 의미는 아니다. 동창 중에 방위병이 더 많았으니까.
하지만, 정당하게 고된 과정을 거쳐 장교로 임관하여 자부심만 하늘을 찌르는 신임소위들이,
자랑스럽게 입어야 할 군복을 입지 못하고 마치 야반도주하듯 은밀하게,
민간인 인척 해야 한다는 현실이 좀 이해되진 않았다.
당시에 광주에서 군복을 입고 택시를 탔다가 , 룸미러로 흘깃 우리의 가슴에 새겨진 공수휘장을 본 기사님이 막 욕설을 하는 일이 있었다.
우리에게 라기보다는 거의 혼잣말이지만 우리가 들으라는 듯이.
그래서 일행이었던 동기가 그런 말을 했다.
" 아저씨. 광주사태 때 우린 고등학생이었어요. 우리가 뭘 안다고 우리에게 시비예요. "
그 말을 들은 기사님은 입을 꾹 다물곤 우리를 목적지에 내려주곤 창 밖으로 퉤 하고 침을 뱉고 사라졌었다.
그렇게 광주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고 전방 자대에 배치를 받았었는데,
인근 연대로 어떤 중사가 전입을 온 일이 있었다.
보통 하사관(지금의 부사관)들은 어떤 부대에 배속이 되면 아주 특별한 경우 아니면 그 부대에서 전역 때까지 근무하기 때문에, 좀 특별한 케이스라 주변에 물어본 적이 있다.
그건 그 하사관의 가슴에 공수휘장이 일반휘장도 아닌 마스터급 휘장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만큼 공수특전단에 오래 있었다는 이야기고, 그 정도인데 아직 상사로 진급도 못하고 최전방에, 그것도 보직도 명확히 안 받은 상태로 전입을 왔기 때문이었다.
인근 부대라 가끔 멀리서 스쳐본 적이 있는데, 그 중사는 군모도 쓰지 않고 늘 멍한 얼굴로 어딘가를 걷는 모습이 보였었다.
군대라는 조직이 폐쇄적인 반면에 내부에서는 쉽게 소문이 퍼지는 편이다.
그 중사는 과거 특전사에서 광주사태에 투입되었던 사람이고, 그 이후에 충격을 받아 머리가 조금 이상해졌으나 그대로 전역시키기도 뭣해서 최전방 보병부대에 전입을 왔지만, 그 부대에서도 딱히 보직을 주진 않아서 그냥 출근해서 멍 때리며 하루를 보내다 퇴근 시간이 되면 알아서 집에 간다는 믿기 어려운 소문.
군대가 생산적인 조직은 절대 아니지만, 어떤 사람도 아무 일도 않고 하루하루를 보내게 놓아두는 법은 없다.
그런 까다롭고 감시의 눈이 산재한 곳에서 그 중사는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막사를 오갔었다.
나중에 대외비 관리를 하는 보직을 맡으면서 내게 주어진 중요한 책무는 군대 내에 반입하면 안 되는 이른바 ’ 불온서적‘의 관리였다.
사병들이 외출 외박을 하거나 휴가를 다녀오며 군대에서 지급된 이외의 물품을 가져오면 당직사관이 물품 검사를 한다. 거기에 ’볼온서적 리스트‘라 불리는 책자들은 가차 없이 압수되고, 그렇게 압수된 책자들은 작전 벙커 내부의 대외비실이라 불리는 철창으로 만든 창고에 목록으로 올라가 보관된다.
나는 작전 벙커에서 근무하면서 그 리스트들을 관리하는 임무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당직사령으로 근무하는 날이면 어차피 밤을 새워야 하니까. 심심하기도 하고 해서 그곳에 보관된 책자들을 읽곤 했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비롯하여 국내국외의 많은 소설류들도 포함이 되었었는데,
당시 나는 고등학생 때 읽었던, 영화화까지 되었던 ’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바로 불온서적에 포함되었던 것이 너무나 의아했었다.
기억하는 소설의 내용들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주변의 이야기들이었고, 물론 작가의 창작물이긴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사실이었던 것이 많았으므로.
해서 역설적으로, 불온서적을 관리하다 보니 불온서적을 거의 다 읽는 우스운 상황이 된 것이다.
보직이 보직이다 보니 이른바 ’ 부대일지‘라는 누런 갱지에 검은색 하드보드지로 책철이 되어있는 것도 읽어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겠지만, 그때는 모든 기록들이 종이에 볼펜으로 기록하게 규정되어 있었으니까.
문자 그대로 부대일지에는 해당 부대의 창립일부터 일어난 모든 일들이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부대일지는 ’ 대외비‘에 속한다.
부대의 병력과 주둔지와 예비주둔지, 수행한 작전이나 평소 부대업무 등이 모두 기록되어 있으니까.
그곳에, 놀랍게도 해당 부대가 과거에 삼청교육대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연병장에 대형천막을 세우고 그곳에서 생활하고, 교육대 입소자들은 병사용 막사에 수용하고 외부에서 잠금장치를 채워 외부 활동이 불가하게 하고, 매일 병사들이 유격훈련조교처럼 입소자들에게 PT체조와 목봉체조(예전에 뉴스에서 보았던 전봇대 들어 올리는 것이 목봉체조였다는 것을 군대에서 유격 훈련을 받으며 알게 되었다)를 시키고.
한마디로 온종일 기상부터 취침 전까지 유격훈련장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매일 쉬지 않고 반복했다는 기록도.
병사들은 그나마 따뜻한 막사를 빼앗기고 훈련장처럼 냉기도는 텐트에서 생활을 하고,
원래의 부대 수용인원의 곱절이 넘는 인원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씻는 것. 먹는 것. 모든 일상이 힘겨워졌으니 수용자들을 얼마나 괴롭혔을까.
게다가 부대원들 대부분은 수용자들이 중범죄자 혹은 깡패 같은 ’ 사회악‘이라고 교육받고 말도 섞지 말라는 엄명을 받은 상태였을 테니.
언제 석방이 될지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끝없이 유격훈련이 계속되는 나날이라니.
차라리 교도소 보다 훨씬 못한 셈이었다.
그런데, 내 동창 녀석이 그런 장소에서 일정기간을 보냈다는 게, 왜 멀쩡하던 녀석이 반 실성한 상태가 되었는지 명징하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저런 곡절들을 거쳐서, 이젠 ’ 광주사태‘ 가 ’ 광주항쟁‘ 이 되고 해당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도 나오고 이에 관련한 소설을 썼던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으니 그나마 좀 나아진 건가.
글쎄다. 사실을 겪어보지 않은 내가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느낀 감정은 다소 복잡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내 생각에 ’ 광주항쟁‘은 ’ 광주학살‘로 불려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 항쟁‘이라 하면 최소한 어느 정도 군사력을 가진, 전투훈련을 받은 무리들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이데올로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무자비한 폭력에서 살아남으려 무기를 잡는 것은 그저 생존본능이다.
지극히 간접적인 시각에서 읽어본 작가의 책과, 그 외에 광주에 관한 사실들을 읽었을 때 비로소 나는 상무대에서 외박을 나갈 때마다 적개심 어린 눈빛으로 군복가슴에 매달린 공수휘장을 흘겨보던 시민들에게 공감했다.
항쟁도 뭣도 아니고 그저 무력하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전투훈련을 받은 무력집단에게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했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정작 그런 참극을 만들어낸 장본인들이 떳떳하게 대통령 노릇을 하고,
이후로도 제 명만큼 살다가 자책조차 치매로 다 잊고 편히 갔다는 현실이 블랙코미디라고 생각한다.
죽을 것처럼 힘겨운 과정과 훈련을 마치고 임관할 때 정복을 입고 도열하여 복창하는 임관선언은 이렇게 시작한다.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여기서 민족 이란 이제 국민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다민족 국가로 변화하고 있음을 고려한 것이고 기본 적으로 민족=국민이다.
군인은 국민을 수호한다. 그게 기본이다.
거기서 벗어나면, 군인이 국민을 위협하고 사상한다면, 그것은 이미 군인도 장교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