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분노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왜 작고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그러게나.
왜 나는 이리도 사소한 일에 분노하는가.
정작 내가 분노할 거리는 차고 넘치는데.
초등학교부터 사관학교까지 '도덕'에 관련한 시험이면 여지없이 등장하던 문제 들.
"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 "
과연 그 시절 줄기차게 외울 정도로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던가.
내가 성장해 온 기나긴 세월 동안 위정자들은 과연 공익과 질서를 앞세웠는가.
실로 나라의 융성이 나를 발전하게 하였던가.
누가 우리 세대를 그토록 폐쇄적이고 옹고집인 집단으로 교육시키고 키워냈던가.
저런 '대의'들에 체념하여야 하고 적응하지 못하면 현실자각을 못하는 이상주의자 밖에 안된다고 과연 누가 내게 그렇게 채찍질하고 순응하게 만들었던가.
나이 스물에 분노하지 못하면 젊은이가 아니고 나이 서른에 분노하는 건 있을 수 있지만,
나이 마흔이 넘어 분노하는 것은 철이 없는 거라고 누가 내게 훈시를 했었던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고, 내 불만으로 뭔가 달라질 것이 아니라면 분노하기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앞가림을 잘하는 것이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이 되는 길이라는 것을 누가 내게 강요하는가.
'대의'에 분노하지 말고 가상화폐 나 부동산, 주식에 일찌감치 눈을 돌려 ' 부의 축적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것이 서글픈 현실 파악이었다만,
왜 우리는 연예인의 사생활에 공분하고 축구팀 감독의 경질에 분노하며,
정작 우리가 낸 세금을 길바닥에 어설픈 물건들로 가득 채우는 행정가들에게 분노하지 않는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고 대대손손 이어갈 자본가들을 존경하며,
그들이 만들어낸 세상 쓸모는 사실 없는 잉여물 들을 향유 하며 기꺼이 지갑을 여는가.
모두의 미래를 위해 만들어낸 고용보험이나 의료보험의 허점들을 최대한 이용하여
무위도식하며 수당을 받아내고 받아낸 돈으로 동남아 한 달 살기를 즐기는 이들에게 분노하지 않는가.
그 수많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결국 오늘도 작게 줄어들어 담겨 나오는 짜장면에 분개하고
월급에서 점점 더 많이 떼어가는 4대 보험에 분노하고 몇 원 오른 택시 요금에 분노한다.
왜 나는 이런 분노를 야기하게 만든 책임감 없고 입으로 떠들어대는 헛소리에 의존하는 정치가,
국민의 여론을 원하는 모양새로 휘둘러가는 언론들에 휩쓸림에 분노하지 않고,
카드 포인트 사용처가 줄어들었음에 분노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