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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차장이 기안을 올린 기획안은 정말 기발했다.
기발함이 지나쳐서 뭔가 반 사회적이기도 하고 반 체재적인 냄새까지도 나는 것이다.
고작 보험회사의 일개 기획부서장인 이 부장의 사고로는 도저히 선뜻 기안을 올릴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 부장은 평소에 가끔 전화로 안부나 묻곤 하던 동창 녀석과 저녁약속을 잡았다.
‘정치’라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은 가급적 멀리 하는 게 신념이라면 신념인 이 부장 이긴 하지만, 부하직원이 기안서라고 올린 것이 불러올 파장을 생각한다면 평소의 소신을 좀 굽히기도 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으로 극히 부정적인 시선으로 기안서를 보긴 했었으나, 오랜 기간 보험업계에서 살아남은 이 부장의 생각에도 뭔가 이 기획안은 어쩌면, 아주 크게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뭐? 그런 보험을 만들 생각이 있다고?
- 아니 뭐, 아직은 그저 기획 단계일 뿐이라서....
술 몇 잔이 돌고 나서 지나가는 말처럼 이 부장이 ‘기획안’에 대해 말을 꺼내자, 수다스럽게 요즘 국회 분위기가 어쩌고 저쩌고 마치 국가의 미래를 혼자 다 짊어진 듯 큰 소리를 탕탕 내던 동창 녀석이 바로 진지한 얼굴로 변해서 이 부장이 오히려 당황스러워했다.
- 음.... 그거 아주 괜찮은 아이디어 같은데. 좀 위험하긴 하지만.
- 어? 그래?
동창 녀석으로부터 의외로 기획안을 지지하는 대답이 나오자 이 부장은 오히려 뜨악해졌다.
-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보험에 가입한 사람이 불치병에 걸리거나 소위 ‘인간의 존엄’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질병에 걸리면 보험사가 ‘알아서’ 안락사 처리를 도와준다 뭐 이런 거 아닌가?
- 어허, 이 사람!
지나치게 커다란 동창 녀석의 목청에 제풀에 놀란 이 부장은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 안락사 처리를 도와준다기보다, 음.... 본인이 원한다면 안락사에 쉽게 접근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얘기지.
이 부장의 설명에 동창 녀석은 픽, 실소를 흘리며 소주잔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 그 말이 그 말이잖아. 괜찮은데? 그 보험에 가입할 사람이면 이미 그런 마음을 먹고 있다는 거고.
원래 그 생명보험이란 게 가입자가 질병 병력이 있거나 하면 아예 가입도 안되잖아?
그런데 그 상품은 병력이 있어도 대환영이고, 사전에 질병이 없었어도 질병에 걸려서 앞으로 살아가는 내내 보험료를 타낼 사람이 중복 가입해도 땡큐고.
어쨌거나 보험사에서는 장차 지불할 보험료도 절약하고, 일반 가입자에겐 그렇게 해서 여유가 생기는 보험사에서 서비스를 더 잘해줄 목적이니 반대할 이유도 없고. 그렇지?
- 그야 그렇지만....
기안서의 핵심을 콕 짚어내는 동창의 넉살 좋게 생긴 얼굴을 보며 이 부장은 잠시 생각이 들었다.
대체 정치란 어떤 직업이기에 이토록 단순 명료하게 정리를 해내는 걸까? 하고.
정작 보험업계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자신조차도 그 기안서를 처음 봤었을 때는 뭐 이런 개떡 같은 걸 보험상품으로 출시한다고? 하는 생각부터 들었었으니까.
그렇지 않나.
명색이 ‘생명’ 보험인데.
몸에 질병이 생기거나 크게 상해를 입었을 때 병원비를 보존해 주고, 장애를 얻게 되면 일정 금액을 보상해 주고, 사망할 경우에 일정 금액의 위로금을 내주는.
그게 생명보험 아닌가.
그런데 그게 아니라, 큰 질병이 생겼거나, 혹은 노화로 인해 인간적인 삶에 어려움을 겪거나 할 때 본인이 원한다면 이른바 ‘안락사’를 시켜주겠다는 것 아닌가.
그건 이 부장의 생각에는 생명 보험이 아니라 사망보장용 보험인 것이다.
김 차장이라는 놈이 그럴듯하게 ‘안락 생명보험’이라는 제목으로 분칠은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 부장은 이 기획안이 가진 본질.
즉 생명에 대한 경시? 자살에 대한 조력? 인간성에 대한 기준 같은 것에 회의를 느꼈었던 거다.
그런데 정작 몇 마디 듣자마자 이 동창이란 녀석은 갑자기 흥미진진한 얼굴로 변했으니.
- 아주 괜찮은데? 보험사로서는 회생이 불가할 가입자에게 천문학적인 병원비를 계속 쏟아낼 필요도 없고.
그렇게 부담이 발생하면 보험사는 어떻게든 일반 약관을 약화시켜서 보험료를 줄이려고 애써야 할 텐데
그거 안 해도 좋으니 일반 가입자에게도 이득이고.
국가적으로도... 잉여인원에 대해 불필요한 사회보장비를 계속 쏟을 필요가 없어지고.
게다가 가입자 본인은 스스로가 원하는 대로 아~주 깔끔하게 더 이상 추해지기 전에 스스로 마감을 짓는 거니.... 너무 좋은데?
실로 진지하게 ‘국책’까지 들먹이는 동창 녀석을 바라보며 이 부장은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렸다.
- 그게 그렇게까지 되는 거야? 국가에도 이익을 주는 그런 거라고?
- 야, 생각해 봐. 물론 국가의 정책은 국민의 삶을 ‘보호’ 하는 거 맞지.
그런데 어차피 일어나지도 못할 노인들과 환자들의 수발에 드는 비용들을 소수에 불과한 젊은이들이 다 짊어져야 하고, 그렇게 사용되는 사회비용 때문에 나라에 정작 미래를 위해 써야 할 돈이 다 새나간다면 손해잖아. 그건 보험사도 마찬가지 아냐?
보험료로 들어오는 수입보다 나가야 할 보험료가 많아지니 많은 생보사들이 휘청이는 거 아니냐고.
내가 그 보험에 대해서 아이디어를 하나 줄까?
입가에 찌그러트린 입술로 미소 아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 동창, 국회의원보좌관 명함을 가지고 다니지만 실제로는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한구봉의 말에 이 부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이 부장은 잘 알고 있는 편이다.
모든 일에 관심을 갖지만 동시에 모든 일에 관심이 없는.
완고한 형태의 구태의연한 회사조직에 딱 맞는 인간형이라는 거.
그는 기발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현 상태를 유지하며 무탈한 게 좋았으니,
만년 차장급의 지점장인 김종선이 뜬금없이 들고 온 제안서라는 것에 대해 뭔가 두렵고, 그러면서도 이게 어쩌면 회사의 미래를 책임질 커다란 먹거리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굳이 한 구 봉에게 만남을 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부장은 한구봉이란 동창 녀석이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무엇을 하는 인물인지는 몰라도,
일찌감치 고교시절부터 녀석이 뭔가를 ‘만들어내는’ 데 천재적이라는 것은 안다.
- 일단, 자네가 말한 그 인원구성을 잘 이용해 보는 거지.
네가 걱정하는 것은 그 보험상품으로 회사가 문젯거리로 오른다거나 가십에 휘둘리는 게 걱정인 거잖아?
아,아. 인륜, 패륜, 이런 것 다 무시하고 말이야.
한구봉이 정확히 핵심을 짚어내자 이 부장은 가슴이 뜨끔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따금 녀석을 만나면서도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 자, 그 보험의 실제 약관을 다듬고 보험 관련법에 맞게 다듬을 최전방 영업사원 선임이 있고 한물간 변호사가 있어.
거기에 뭐 화학자라곤 할 순 없겠지만 화학전공자로 실행에 필요한 약물을 개발할 작자도 하나 있고. 그렇지?
거침없이 구성원을 조직해 내는 한구봉의 말에 이 부장은 잠시 침을 꿀꺽 삼켰다.
- 일단 걔네들로 자회사를 만들어.
여차하면 본사가 발뺌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거지.
물론 그 자회사를 컨트롤할 수 있는 자리는 자네가 차지해야지. 그래야 뭐라도 남는 게 있잖아?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빠진 게 있어. 뭘까?
이 부장은 순식간에 방법론을 조합해 내는 한구봉의 빠른 두뇌에 감탄했지만, 거기에 뭐가 빠진 건지는 생각도 못했다.
한구봉이 제안한 회사 조직의 형태는 이 부장도 어느 정도는 머릿속에서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니까.
대기업에 몸담은 게 몇 년인데.
뭐든 신생사업으로 위험성이 있는 사업은 늘 그렇게 별도의 자회사로 시작해서,
경과와 결과가 만족하면 본사 사업부로 받아들이고 그 반대일 경우 발뺌하며 쳐버리기 좋은 조직 구성이니까.
- 글쎄? 윤리적인 문제 말고 뭐가 있을까?
- 이런. 쯧쯧. 아직 순진하구먼. 이 부장.
혀를 차는 한구봉을 보며 이 부장은 순간적으로 불쾌감이 들었으나, 그게 어느 정도 맞는 말인 것은 안다.
이 부장이 사회생활, 그것도 대기업 계열의 보험사에서 부장까지 달았지만 세상의 대부분을 모르는 게 사실이니까.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부장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 정치. 정치가 필요하다 이거야. 그래야 법안도 잘 넘어갈 수 있고 여차하면 여론전을 벌이기도 좋지 않나. 속된 말로 ‘뒷배’ 없이 그런 사업이 되겠느냐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