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트라 매니아 9

by 능선오름

울트라매니아 9


다음 날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출근을 했다.

이제 얼굴이 익숙해진 어깨 1이 출입문에 다가선 내게 말없이 사원카드를 내밀었다.

그 표정은 내가 기억하던 거만스럽고 위압적인 것이 아닌,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을 바라보는 자의 얼굴처럼 희한한 표정들을 버무린 상태였다.

놀라움, 불신, 황당함, 짜증, 그리고 공포가 얼핏 섞여있었다면 내가 오버인가.


자리는 여전히 휘발성 프린트의 냄새나는 구석 자리였다.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분명 팀원들 중 몇은 사실을 알 것 같은데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을 뿐.

분명 팀장이 뭔가 지시를 내린 것이리라.

하긴, 하루하루 자기 밥벌이도 바쁜 그들에게 설사 내가 뛰어내려 죽었다 할지라도

아마 크게 달라지는 일과는 없었을 것이었다.

점심시간 밥반찬 삼아 떠들 화젯거리라거나 혹은 커피 한잔에 숨어서 담배 피우며 시시덕거릴 그런.


조금 형태는 다르지만 그런 일들이 있었다.

게임 개발부 직원 들 중에 격무를 이기지 못해 옥상에서 뛰어내린 일이.

그렇지만 그뿐. 뉴스에 한 줄 나고, 관할 서에서 와서 투신자 신병 확인과 유서 같은 거나 찾고.

그뿐이었다.

한동안 회사에서 대회의실에 부서별로 직원들을 모아 교육이라는 걸 하고,

교육의 내용은 잘 기억도 안 나지만 사람들에게 나눠준 음료수가 그날따라 좀 비쌌다는 기억은 난다.

그 일이 있고 며칠 동안은 회사 구내식당 메뉴가 좀 좋아졌고 사내 건의함이라는 카테고리가 사내 업무 시스템에 추가되었다는 것도.

물론 그 카테고리에 건의를 하는 멍청이는 없었다.

군대의 소원수리 라는걸 겪어본 전역자들이 꽤 많았으니까 말이다.

그저 죽은 사람만 억울하고,

그 부모가 회사 앞에서 목에 플래카드를 내걸고 몇 달 1인 시위를 한 것 말고는 말이다.

그리고 이내 사람들의 가십거리 조차도 못되어 사라질 뿐이었다.


나 역시, 대단한 걸 기대한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적어도, 의도치 않은 활극으로 인해서 해고를 면했지만,

내 업무 능력치가 있으므로 그리 나아질 조건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나를 합법적인 해고를 하려고 할지 몰랐다.

이상스럽게도 그날 이후로 내겐 좀 더 거칠고 힘든 일 들이 주어졌다.

말은 영업팀 소속인데도 회사에서 따로 용역을 주는 파견회사 직원들의 영역에 할당되었다.

이를테면 회사에서 반출되는 게임 타이틀의 박스 운반 상하차 같은,

용역들이 하던 일을 함께 하라고 지시가 내린다던가.

뭔가 힘쓸 일 같은 일 들이 많아졌지만,

못한다고 하면 또 해고용 꼬투리를 잡을 것 같아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죽었다 살아났다고 힘이 세진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박스를 운반 한 날은 녹초가 되었고 온몸이 파김치가 되었다.

이따금 생수통까지 날라야 하기도 했다.

굳이 좋은 정수기들이 흔한데 왜 이런 대형회사에서 생수를 쓰는 건지.

대표의 처남이 생수를 납품한다는 건 알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날 이후 이상스럽게도 내겐 우연한 사고가 잦았다.

쌓인 박스 더미가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린다던지,

화물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고장 나서 떨어지는 바람에 승강기가 반파가 된다든지,

노역에 지쳐 잠시 창고 구석에서 점심시간에 낮잠을 자고 있는데,

느닷없이 지게차가 창고로 후진해서 들어와 깔리다시피 한다든지.

졸지에 나는 사건사고의 아이콘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회사 내에서 온갖 사고가 일어나서 내 옷은 성할 날이 없었다.

옷이 더럽혀지고 갈가리 찢기는 사고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내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겁도 났었지만, 어느 정도 여러 번 사고를 겪고 나자 확신이 생겼다.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지만, 내 몸에 뭔가 이상이 생긴 게 분명했다.

나는 이따금 내 몸이 정말 상처가 나지 않는 것 인지 궁금해서 일부러 상처를 내보려 했다.

박스 포장용 커터 칼을 손등에 슬며시 그어 보았다.

생채기는커녕 자국도 나지 않았다.

좀 더 대담해진 나는 망치로 손을 내려쳐 보기도 하고,

어찌해도 아무렇지 않자 포장용 전동 펀칭기 에 손을 넣어 보기도 했다.

미련스러운 방법이었지만,

펀핑기는 웅웅 모터 소리만 낼뿐 내 손등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손을 감싼 장갑이 너덜너덜 해지도록 말이다.

분명히 물리적 충격이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별 감각도 못 느끼고 생채기 하나 안나는 나 자신이 문득 두려워졌다.


사실,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더 이상 수염이 자라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아침마다 하던 면도를 하려 해도 수염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면도날로 슬쩍 팔뚝에 나 있는 털을 밀어도 잘리지 않았다.

그런데 묘하게, 자연적으로 떨어져 나간 털이라던가 머리카락은 면도칼에 잘 잘렸다.

일단 내 몸뚱이에 붙은 모든 것들이,

강철 갑옷이라도 입은 듯 어떤 물리적 충격에도 반응이 없었다.

그렇듯 온갖 종류의 충격과 자해를 가해도 몸뚱이는 고사하고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그러나 화장실에 가서 힘을 잔뜩 주고 소변을 보아도, 도기가 깨지거나 하진 않았다.

옆으로 튀는 오줌발에 청소 아줌마의 독기 어린 눈총만 받을 뿐.

아무래도 나는 절반의 '생존형 슈퍼맨'이 된 모양이다.

아, 이게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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