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딸아,
엊그제 지인 할머니 병문안을 다녀왔었지.
네가 천성이 곱다 보니 할머니가 병을 앓으시는 걸 무척 안타까워하는걸 안다.
그 할머니 또한 알고 보면 일평생 우여곡절이 많았던 분이다.
젊어 지방의 나름 ‘가문’에 시집을 가시고 남편분의 사업실패로 고생도 하시고,
그 여파로 지역의 작은 공직에서 반평생 월급 공무원으로 사셨지.
그러다 몇 년 전에 정년퇴직하시고 아들딸 다 시집·장가를 보내서 이제 정말 당신 자신만을 위해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시려고 희망을 품었던 분이다.
그렇게 일 년도 못사시곤 덜컥 암에 걸려서 그때부터 줄곧 항암치료를 받고 계시지. 먼 지방에서 서울을 오가며.
다행이라면 이제 책임질 자식도 없고 보험에 들어 있어서 그나마 치료비 부담이 덜 가는 상황이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거지.
그런 분이 몇 달 전에 갑자기 고가의 명품 시계를 구매한다고 하셔서 좀 의외였다.
게다가 당시는 갑자기 명품 바람이 불어서 중고물건도 웃돈을 붙여서 파는 그런 시기였는데.
죄송한 말씀 이긴 한데 암을 완치하신다고 해도 사실 언제고 재발이 가능한 상황이고,
만약 그러다 돌아가신다면 천만 원이 넘는 그 시계가 대체 무슨 의미일까 했었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일평생 당신 자신을 위해 뭔가 해보지도 못해본 분이,
죽기 전에라도 뭔가 해보고 싶고 갖고 싶던 거 하나 가져볼 욕심을 부리는 게 나쁜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더구나.
그분도 어쩌면 아빠의 선대들처럼 일생 언젠가…. 언젠가는……. 이라는 마음으로 사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마음의 부담이 좀 덜할 때 당신 자신을 위해 뭔가라도 하고픈 마음이었을지도 모르지.
사실 그분이 그리 넉넉한 상황도 아니고, 시집간 딸이라거나 아들이라거나 손주 손녀를 생각해서 뭔가 더 해주실 마음을 가질 수도 있는 일이니까.
어쩌면,
아빠가 그 입장이라면 차라리 그 돈으로 딸에게 손주 뭐라도 해주라고 여윳돈을 줬을지도 모른다.
아빠라며 아마, 앞서 말했던 유전적 ‘청승’ 때문에 그리했을 거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게 그리 옳은 일만은 아니기도 하겠구나 싶었다.
어쩌면 그분은 당신이 존재했다는 것을,
대를 이어 물려줄 수 있는 명품 시계 하나에 기록하고 싶던 건 아닌가 한다.
그렇게 나중에 딸에게 그리고 손녀에게 물려주실 수 있으면 그 물건으로라도 후손들의 기억에 남겨지는걸 원하셨던 게 아닌가? 막연히 상상해 본다.
아빠도 늘 어떤 중요한 물건이 있으면 그걸 나중에 네게 물려줄 것이고,
그것으로 네가 아빠를 추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없지 않으니 말이다.
또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그분이 아프시기 이전에 그런 마음을 가졌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다.
그걸로 평생의 고생이 탕감은 안 되더라도 심리적인 작은 보상 같은 거라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
그래서 모든 게 때가 있는 법이다.
물론 사람이 앞의 일을 전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우니 그럴 일이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겠느냐만.
어떻든 모든 일에는 이유는 존재한다.
그러나 사람의 힘으론 그 이후의 일을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내가 알기로 그분 또한, 힘들던 시절을 견뎌내기 위해 혹은 자신이 그냥 좋아해서,
일평생 술과 담배 속에서 사셨다.
정년 퇴직 후까지도 그랬었다.
물론 지금이야 병 때문에 다 내려놓으셨지만 그렇게 살아오셨다.
그토록 몸에 안 좋은 것들을 평생 예정했는데 몸이 멀쩡하긴 어렵겠지.
그걸 알면서도 또 자기 몸을 함부로 하는 게 사람이다.
어쨌든 그건 이미 지난 일이기에, 남은 생에 뭔가 하나라도 본인이 원했던 걸 하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이해했다.
그러니 딸아.
너는 네가 네 건강을 지킬 수 있을 때 지켜가고,
네가 정녕 원하는 일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하거라.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고 견뎌낼 육신도 기다려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