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에는 세르파가 있다.
눈보라에 시야가 흐려지는 길,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숨이 가빠오는 고도에서 묵묵히 앞장서는 사람들.
그들의 어깨에는 정상을 향해 가는 사람들의 짐이 얹혀 있고, 그들의 발걸음은 보이지 않는 길을 열어낸다.
정상을 오른 환호는 등반가에게 돌아가지만 그 환호를 선물하는 것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그들의 곁을 걸어온 세르파이다.
지금까지 나는 히말라야의 그들처럼 누군가의 무게를 나누어지고, 길을 찾아주며, 뒤에서 지켜주는 일에 익숙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일들이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처럼 누군가의 호흡에 내 호흡을 맞추었고, 링 위의 코너맨처럼 지쳐 쓰러지는 누군가를 위해 물을 건네주었으며, 주인공은 아니지만 무대를 가능하게 만드는 스탠드인처럼 나는 언제나 빛나는 주인공보다는 그림자의 역할을 해왔었던 것 같다.
두 아이들의 엄마역할을 맡게 된 뒤에는 그들의 그림자가 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한낮에는 잠시도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한밤중에는 그들의 숨소리조차 놓치지 않기 위해 지새운 밤이 부지기수다. 목도 못 가누는 아이들을 위해 그들의 손, 발이 되었고, 질풍노도 시기의 아이들을 위해 그들의 길잡이가 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그들의 철저한 그림자가 되는 것이 나의 사명이었고, 나의 행복이었음을 부정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이제 성인이 된 그들은 더 이상 대신해 줄 손과 발이 필요 없게 되었고, 자신이 나아가는 길에 더 이상 길잡이가 필요치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점점 그들에게서 멀어지는 그림자는 문득 생각에 잠긴다.
나는 이제 누구의 그림자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질문은 단순했지만 오래도록 내 마음을 흔들었다.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 누군가의 그림자로 머물지 않기로.
인생은 한 번이고 이제는 나를 위한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내 삶의 짐을 내가 지고, 내 걸음으로 내딛으며, 내 정상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둠 속에서 난 많은 준비를 해왔다.
언젠가 맞이할 밝은 세상에 나갈 준비를...
나이라는 굴레에 발목을 잡히지 않기 위해 여러 분야를 학습하고 나를 단단하게 단련시켜 왔다.
타인의 짐을 지는 동안 나의 어깨는 강해졌고, 보이지 않는 길을 찾기 위한 나의 눈은 더욱 선명해졌으며, 험한 산길을 걸으며 나의 두 다리는 더욱 튼튼해졌다.
나는 그렇게 반백살을 준비하며 강해졌고, 또 강해졌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나의 첫걸음을 내가 정렬하는 이 글자들 위에 던진다.
나의 생각, 나의 가치관, 나의 삶을 글밥들 위에 온전히 쏟아낸다.
어느 누구의 시선도 어느 누구의 목소리도 장애물이 되지 않는 오롯이 자유로움에 온몸이 떨리는 이 순간이 바로 내가 주인공이 되는 시간이다.
어떤 조각들을 모아 글을 만들까 하는 고민이 달콤하게 느껴지고, 불빛 아래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청량하게 들리기도 한다.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 이렇게 황홀하고 환상적인 것인지 모르고 살았다면 하는 아찔한 생각마저 든다.
이런 나의 행복들이 감사함이 되고 그 감사함이 모여 세상에 힘들고 사람에게 지친 이들에게
또 다른 세르파가
또 다른 코너맨이
또 다른 스탠드인 될 수 있다면
아마도 나는 세상 가장 빛나는 주인공이 될 것이다.
덧붙여 작은 바램 하나를 더 욕심내자면,
이곳에 담는 나의 소박한 글들이
나의 첫 딸에게는 여자이자 엄마 선배로서 선물해 주는 인생의 입문서가 되었으면...
나의 막내아들에게는 온마음을 다해 열심히 살았던 엄마의 회고록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훗날 내가 그들 곁을 떠나야 하는 때가 와도 함께 했던 기억의 열쇠 하나는 남겨줄 수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