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빵처돌이 Sep 16. 2021

유지어트는 쉬울 줄 알았는데:
야채에도 때가 있다

36kg를 감량한 탄수화물 중독자의 유지어트 이야기




야채가 몸에 좋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탄단지 식단에서도 야채는 꽤 지대한 역할을 맡게 되는데, 그것은 부족한 식사량과 포만감, 비타민 같은 영양소를 채워주기 때문이다. 비단 다이어트 뿐만이 아니라도 건강한 삶을 위해서 야채는 필수적으로 섭취해야 하는 식재료다. 


그러나  초중고 내내 급식으로 하루 1~2끼를 때운 청소년이 야채를 좋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에서 야채 반찬이라 함은 주로 나물류인데다가 원물 그대로의 생김새는 젓가락이 쉽게 가기 힘들다. 게다가 용기를 내서 돌아오는 맛이라곤 씁쓸하거나 짜거나 매운 양념의 맛이었고 어른들은 그게 건강한 맛이라며 아이들의 실망감에 부채질을 했다. 그걸 먹어야 건강해지고 살이 안 찐다나 뭐라나...  


수저를 놓기 무섭게 배고픈 10대들이지만 몇백원만 주면 주먹만한 빵에 달콤한 음료수까지 먹을 수 있는데 급식 반찬 한두개에 목을 맬 친구들은 없다. 게다가 급식에 꾸준히 나오는 나물 반찬은 솔직히 맛 없었다. 간장에 절여진 오이무침이나 시뻘건 도라지 무침을 잘 먹는 친구들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세살 버릇 여든 까지 간다는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 역시 다이어트 전까진 야채라곤 콩나물과 시금치나 좀 먹던 불량 어른이었다. 야채를 구매하거나 샐러드를 입에 대기 시작한 건 정말이지 요 몇년 사이의 일이다. 야채의 맛을 알았다기보단 야채가 꼭 필요한 식품이라는걸 인정했다. 마치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한창 다이어트를 했던 시절에는 강박증처럼 생야채를 챙겨먹었다. 하지만 나는 쓴 맛 나는 야채는 물론이고 특유의 향기를 가진 향채조차 먹기 거북해하는 입맛을 가졌다. 당연히 고수나 청경채도 고역이다. 먹을 수 있는 샐러드 야채라곤 양배추나 양상추 정도에, 그나마도 심지가 얇고 야들야들한 잎이나 먹지 두툼한 줄기를 씹다보면 구역질이 나오고 이게 무슨 맛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먹었다. 다들 어떻게 이런걸 잘도 먹을까 감탄했다. 샐러드가 곧 다이어트라고 여기던 시기였다. 야채를 먹어야만 다이어트가 성공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 말이 맞긴 하다. 야채는 고기나 곡물로는 채워주기 힘든 영양소가 들었을 뿐만 아니라 낮은 칼로리에 포만감을 준다. 그렇다고 해서 삼시세끼 샐러드만 먹으라는게 아니라, 하루 한끼 정도 샐러드와 삶은 계란 같은 단백질로 채운다면 나머지 식사를 조금 윤택하게 해도 괜찮다는 뜻이다. 그러나 샐러드의 장점 백가지를 읊어도 '먹기 싫다' 라는 생각 한 번이면 와르르 무너진다.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서브웨이라는 샌드위치 브랜드였다. 다이어트 중에 빵은 금물이라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빵처돌이였고, 빵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생야채조차 섭취할 수 없었다. 가격은 나름대로 합리적이었고 원하는 야채 토핑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소스나 빵까지 고를 수 있어서 다이어터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나는 늘 닭가슴살 패티가 들어간 샌드위치나 칼로리가 350kcal 이 넘지 않는 메뉴를 골랐다. 주로 터키나 서브웨이 클럽을 먹었다. 가끔 고기가 잔뜩 씹히는 로티세리 치킨을 먹으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에그마요나 스테이크 같은 고칼로리 샌드위치가 맛있다는걸 누구보다도 알지만, 다이어터라는 얄팍한 죄책감이 나를 말려주었다. 


내가 서브웨이를 사 먹을때 반드시 지켰던 철칙이 있다. 빵 속은 무조건 파달라고 할 것. 빵을 판다는게 무슨 뜻인지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텐데, 서브웨이 직원분께 '빵 속을 파주세요' 하면 그야말로 내부를 싹싹 긁어 최대한 부드러운 부분을 제거해 주신다. 탄수화물을 줄이는데도 요긴하고 빈 부분만큼 야채를 채울수도 있으니 아주 좋은 방법이다. 야채를 고를때는 되도록 피클을 뺐다. 절임 야채다보니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칼로리가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소스는 늘 레드와인과 후추만 뿌렸다. 이게 가장 힘들었다. 당연하게도 처음에는 정말 맛 없었다. 시큼털털한 와인과 후추에 샌드위치를 먹으려니 참으로 고역이었다. 랜치니 허니 머스터드같은 소스를 듬뿍 뿌려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참았다. 


왜냐하면 빵을 먹는다는 기쁨이 생야채와 빈곤한 소스를 모두 이겨냈기 때문이다. 참 어지간히도 빵을 좋아한다 싶으시겠지만 정말이었다. 다이어트 중에 빵은 절대 금기시 해야하는 식품이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나는 이 서브웨이를 하루 한개꼴로 먹으며 다이어트를 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생야채와 단백질과 탄수화물이 적절히 조합된 아주 건강한 식사라고 생각한다. 제법 두툼하고 묵직한 샌드위치를 달랑달랑 들고 돌아가는 길은 그다지 힘들지도 배고프지도 않았다. 내 입에도 즐겁고 몸에도 건강한 음식을 공급한다는 일의 기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도 때가 있듯, 야채에게도 때가 있다. 나는 억지로 먹던 야채가 내 몸을 서서히 바꿔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기까지 근 30년이 걸렸다. 그 놀라움과 신비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아무나 붙잡고 조금이라도 야채를 드세요! 하고 설득하고 싶은 심정이다. 어린 시절 야채를 먹으라던 어른들이 참으로 짜증스러웠는데 이제는 내가 그 잔소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격세지감이랄까, 세상사 이렇게 빙빙 돌아가는거구나 하는 이상야릇한 생각도 든다. 


지금도 나는 향채소나 쓴 나물을 못 먹는다. 하지만 예전만큼 야채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거면 된 거 아닐까. 굳건히 지켜왔던 야채와의 첫 인상이 이렇게까지 바뀌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또 어쩌면 10년 후에는 도라지며 고수 같은 진짜 '어른 입맛' 을 가진 분들이나 먹는 음식을 맛있다고 찾아다닐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싫어했던 음식이 좋아지면서 더 넓어진 세상이 즐겁고 신기하다. 건강하기까지 하다니, 땡 잡은 기분도 든다. 다이어트와 유지어트를 겪다보면 음식에 대한 갈급함은 더해지는 반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의 폭은 엄청나게 줄어든다. 하지만 나처럼 다른 길에 눈 뜨는 경우도 있으니, 혹시나 주변에 편식하는 사람이 있다면 잔소리 대신 너그럽게 바라보며 '너도 언젠간 때가 오겠지'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 보자.  


작가의 이전글 유지어트는 쉬울 줄 알았는데: 플렉스가 하고 싶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