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이다!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욕이 없는 날로
오늘은 더 이른 새벽에 난롯불을 지폈다. 깜깜한 색이 어디부터 언제부터 칠해졌을지도 모르게 마냥 까맣다.
난롯불을 더 따뜻하게 감상하는 방법은 내 안의 불을 끄는 것이다. 그러면 타오르던 불꽃만 의지하고 나의 색은 지워져서 밖을 계속 응시하게 된다. 그럼 보인다. 앙상한 나뭇가지의 흔들림이, 바들바들한 마른 나뭇잎이. 결코 까맣지만은 않다. 온 세상이 어둡지만은 않다. 은둔의 빛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내가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내가 과하게 진지해버리면 진짜를 놓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듯했다. 어둡네 깜깜하네 밖의 어둠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나머지는 보지 못한다. 내 안의 빛을, 내 안의 생각을 내려놓으면 많은 것이 보인다. 내 문제를 세상의 전부처럼 무겁게 생각하고 진중하게 바라보다 보면 때로는 방향을 잃을 때가 있다. 본질보다는 그의 부속물에 생각이 잠겨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더 진중함은 더하다. 그러나 어떤 선택이었어도, 어쩔 수 없었어도 지금 처해있는 상황이 최선이다. 나에게는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힘든 문제 앞에서 우리는 심각해지기보다는 남의 말처럼 독백으로 흘릴 줄 알아야 한다. "괜찮아,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흔한 일이잖아, 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야, 교통사고는 예고하고 생기는 일이 아니듯 너도 교통흐름에 피할 수 없었어"이렇게 말해본다. 그럼 내가 너무 진지하게 생각해서 무겁기만 한 나의 고민과 걱정들이 가벼워진다. 나만의 과오가 아니었음을, 문이 없는 방안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내 생각이 많아 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때로는 진지하지 못함이 나를 이끌 때도 있다. 그 힘이 꽤 오래갈 때도 있다. 그것 자체에 재미도 생기도 강박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살다 보니 꼭 해내야 하는 일은 없다. 존재만으로도 고맙다는 말을 듣는 세상이다. 건강한 정신과 몸만 가지고 있어도 따뜻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너무 애쓰거나 진지하지 말자.
그래도 20대의 방황은 적당히 필요하다. 방황의 선택은 진지함의 선택이다. 장고 끝에 이것저것 해보며 나를 탐색하는 시간이라서 귀한 시간이다. 이때의 경험이 삶의 양분이 됨을 이제야 깨닫는다. 50대가 된 지금 내가 아직 그 진지함과 파고드는 성격을 가졌다면 성공했을 수도 있지만, 내가 아프거나, 내 곁에 남은 것이 별로 없을 듯하다.
연초에 스토너라는 책을 읽었다. 스토너에게는 한길만 파내는 열정이 있었다. 그렇게 자기 열정을 쏟아붓는 동안 그의 주의는 어땠을까? 자신은 성공한 자리에 갔을지 몰라도 선택적으로 일군 가정의 가족들은 스토너처럼 행복했을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조던도 우생학에 대한 과한 진지함이 무슨 행위를 하고 있는지 모르게 비윤리적인 파괴의 힘을 만든 것 같다.
이 가벼움이라는 말이 한없이 가벼울 때도 있지만, 때에 따라 꼭 필요한말이다.
내가 심각해질 때, 생각해도 답이 없을 때는 "가벼워지자!, 가벼운 날라리가 되자!" 되뇌며 숨구멍을 만드는 시도도 괜찮을 듯하다.
어둠이 답답하고 까맣게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나도 이렇게 깨닫는다. 내 안의 빛으로 가득 차 저 너머를 보지 못할 뿐이지, 그것의 실체는 존재하고 있단 것을
오늘의 성탄절에 욱하거나 욕하는 마음이 일어도 가볍게 넘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