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중국인과 일본인 사이를 오갈 수 있었을까?

한국인의 무해함에 대하여

by 지구별여행자

2016년, 호주에 몇 달간 머물렀던 적이 있다. 여행자이자 장기 체류자의 중간쯤 되는 상태로,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모이는 작은 모임에 나가게 됐다. 유학생, 워킹홀리데이 참가자, 여행자들. 호주인도 있었고 유럽과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낯선 환경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아시아인들 사이에서는 조금 더 쉽게 가까워졌다. 그중에서도 유독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내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기는 지금처럼 한류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전, 태동기에 가까웠다. 아시아권에서는 이미 한국 문화에 대한 호감이 형성돼 있었지만, 호주나 유럽에서는 일부 매니아층을 제외하면 아직 낯선 편이었다. 멜버른에서는 매년 각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페스티벌이 열렸고, 차이니스 페스티벌에서도 K-pop 음악과 댄스 커버가 가장 큰 볼거리로 등장하던 시기였다.

​다시 모임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 모임에서 중국인, 일본인, 대만인들은 모두 나에게 친절했다. 나는 각각의 그룹과 따로 어울렸고, 자연스럽게 연락처도 교환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중국인과 일본인은 서로 어울리지 않았고, 중국인과 대만인도 마찬가지였다. 나만이 그들 사이를 자유롭게 오갔다. 그때는 그저 “서로 친하지 않나 보다” 정도로 생각했지만, 나중에 돌아보니 그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의식적인 거리감에 가까웠다. 역사적 배경을 떠올리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중국과 일본, 중국과 대만 사이에는 복잡한 역사와 감정의 층위가 쌓여 있다. 물론 모든 개인이 그런 감정을 공유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잘 어울리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다만, 그날의 공기 속에는 설명되지 않는 선이 존재했다.

​그리고 나는 그 선 밖에 있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떠올린 단어가 있다.

​무해함. 무해함이란 누군가에게 호의로 다가갈 수는 있지만 경계해야 할 이유는 떠오르지 않는 상태다.

​적어도 그 공간에서, 한국인은 누구에게도 직접적인 위협이나 역사적 가해자로 인식되지 않았다. 공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경계해야 할 대상도 아니었다. 그저 편하게 말을 걸어도 되는 사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인 존재에 가까웠다.

​한국은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주변국들의 각축 속에 놓였던 시간이 길었다. 내부의 갈등은 많았지만, 주변 국가들에게 지속적으로 공격적인 존재였던 적은 많지 않았다. 적어도 아시아의 맥락 속에서는 그렇게 인식되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그 ‘무해함’이 지금 한국 문화가 비교적 편안하게 받아들여지는 토대가 아닐까. 누군가를 자극하지 않고, 누군가의 상처를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는 위치.

​그때 호주에서 느꼈던 그 미묘한 호의는,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무해함은 힘이 없는 상태일까, 가장 강력한 문화적 위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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