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 페르소나는 왜 실패하는가?1

존중은 호의에서 생기지 않는다

by 지구별여행자

1편 : 페르소나 실험의 시작


나는 ‘착한 사람’으로 행동하면 인간관계가 더 평화로워질 거라 믿었다.
그러나 몇 개의 단톡방을 거치며, 그 믿음은 완전히 깨졌다.


2년쯤 전, 나는 단톡방 세 개에 동시에 들어갔다.
대학교 동아리 이후로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모임에 들어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살아온 세계 말고, 다른 사람들의 세계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가입한 단톡방 3개 중 A 단톡방에서 주최한 독서 모임에 처음 나가 보았다.
연령대는 다양했고, 다섯 명 정도가 모였다.
그날 나는 한 사람이 유독 말을 많이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평소의 나였다면 그냥 넘기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나는 이런 모임일수록 발언의 시간은 어느 정도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말씀이 조금 많으신 것 같다”는 식으로 비교적 직설적으로 이야기했다.
모임이 끝난 뒤, 집에 돌아와서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너무한 걸까?’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은 나를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일지는 실험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착한 사람 페르소나’를 꺼내 보기로 했다. 원래의 나는 토론을 좋아하고,
질문이나 반박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주저 없이 말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 단톡방에서는 내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고, 되도록 부드럽게 넘어가는 사람이 되어보기로 했다. 사실 나는 단톡방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편은 아니었다. 생활은 늘 바빴고,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각자 어떻게 살아갈까?’ 그걸 한 발 떨어져서 지켜보고 싶었을 뿐이다.

이 글은 인간관계에 대한 하소연이 아니다.
상대가 왜 점점 선을 넘게 되었는지, ‘경계가 어떻게 학습되는가’를 관찰한 기록이다.


그렇다면 A 단톡방에서의

‘착한 사람 페르소나’ 실험은 어땠을까.
단톡방에서 나는 소수의 사람들과 서너 번 정도 모임을 가졌다. 모임 중, 충분히 대립이 될 수 있는 주제들이 나왔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내 주장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내 기준에서 ‘선을 넘는 발언’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예를 하나 들자면 이런 장면이었다.
다섯 명이 모인 스터디 자리였다. 여자는 a, b, 나. 남자는 c, d였다. 스터디를 마친 뒤, 약 15분 정도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마주 보는 소파에 사람들이 나뉘어 앉았다. 나는 자리가 불편해 여자들이 앉아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기려 했다.

그때 여자 b가 말했다.
“그냥 거기 앉으세요.”

순간 당황스러웠다.
얼굴이 굳는 게 느껴졌고, 말이 잠깐 막혔다.
내가 불편해서 자리를 옮기겠다고 했는데, 왜 그 선택이 제지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자 a는 “불편하면 이쪽으로 오라”라고 말해주었지만, 나는 결국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어차피 15분 정도면 끝날 거라 생각했고, 괜히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순간 나는 침묵하지 말았어야 했다.
참지 말고, 나를 위해 움직였어야 했다.
그 여자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이미 말할 수 있는 시점을 지나버렸다는 걸.
방어하지 않은 선택은 상대에게 이렇게 전달된다.
“여기는 넘어도 되는 선이다.”

배려라는 이유로 침묵을 선택한 순간,
경계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었다.
그것은 허락이었다.
내가 하지 않았던 말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이 공간에서 어떤 발언과 행동이 허용되는지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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