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느껴보는 소설을 읽는 재미!
성해나의 『혼모노』는 최근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집이다. 한 작품이 끝날 때마다, 작품이 주는 여운에 생각이 깊어졌고, 다음 이야기는 어떤 내용일지 기대가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알 수 없는 어휘들의 향연으로 낯선 느낌이 먼저 들었다.
내 나이 또래에서 사용하지 않는 어휘들이 난무하니 두 감정이 교차되었다. '네이버 사전'에 '카피캣', '레터링 타투', '캔버스 백', '필리스틴'과 같은 말들을 검색하면서, 요즘 MZ들의 삶을 담은 이야기인가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언어를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지적호기심이 일어나기도 했다.
나는사전에서 찾은 말들을 한쪽 옆에다 옮겨 적으며 천천히 읽었다. 밑줄도 치고 네모 칸도 그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몰입하게 되었다. 하나의 소설이 끝나면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며, 이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생각에 잠겼다.
그런 감정이 싫지 않았다. 철학적으로 좀 있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쉽게 떠나보내지 못하고, 잠자리에 누워서 생각해보기도 하고, 가만히 걷다가도 소설의 스토리를 곱씹어보기도 했다.
이 소설의 광고에는 "넷플릭스 왜 보나.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와 같은 말이 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하는 소리려니 했는데, 지금은 솔직히 인정을 한다. 참 재미있게 읽었다. 오랜만에 나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좋은 책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나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렇게 이 책은 그 어떤 자기 계발서보다 나를 성찰케 하는 책이었다.
영화감독 '김곤'의 대중적 이미지는 남다른 배려심도 있고 선하다. 하지만 영화 촬영 중에는 지독한 직업의식으로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 자기 영화에 대한 애정이 과했던지, 눈물 연기를 못하는 아이를 피멍이 들게 꼬집는 학대를 하기도 했다. 그 사건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김 곤 감독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뉜다.
소설의 초반부에는 그 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 작가는 의도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김곤 감독이 받는 혐의가 성폭력이나 마약에 연루된 것인줄 생각했다. 그런데, 후반부에 김 곤 감독의 혐의가 '아동 학대'였음을 알고는 잠시 당황했다.
그렇다면 영화감독 김곤은 아동학대 혐의로 비난을 받고 영화계에서 퇴출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영화만을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가로서 용납되어야 하는가? 솔직히 나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치우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고의 영화감독이라면 그만한 열정과 광기 정도는 허용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 소설을 읽는 순간 가지고 있었던 '나의 모럴'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나의 모럴은 정당한 것인지 돌아보았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폭력은 이런 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선생님. 워딩이 좀 세시네. 가혹하다는 표현은 이런 상황엔 좀 무겁죠.
아뇨 무겁지 않아요. 누군가에게는 분명 상처일 테니까요 ..... 그 일이.
미지 선생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일 때문에 고통받은 사람도 있었다는 거. 다들 아시잖아요. (책. p. 47)
김곤 감독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영화감독으로서 성공적인 길을 걷는다. 그리고 GV(Guest visit)에서는 논란이 되는 사안을 털고 가겠다는 생각이었는지, 공식적으로 사과를 한다. 물론 그러한 김곤의 행동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뜻한 박수로 화답해 주었다. 훈훈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때, 김곤의 팬이었던 서술자의 내면에는 '펑' 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자신이 좋아한 김곤의 실체는, 자신이 보고싶은대로 본 허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내면의 폭발과 함께 그녀는 김곤을 마음에서 지웠다. 그녀의 모럴은 아무리 거창한 목적이라고 해도 나쁜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을 게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소설의 도입 부분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녀는 이빨과 발톱이 다 빠진 채, 약에 취한 호랑이 옆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부끄러웠던 모럴을 확인한다.
그건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
떨쳐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말처럼. 이미 일어난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으니까. (책 . p 65)
우리는 보고싶은대로만 본다. 사소한 희생은 무시해도 좋다는 경향이 강하다.
나도 그렇다. 너는 그렇지 않은가?
이 소설은 이렇게 나에게 묻는 듯 하다.
'스무드'는 지름이 2M에 달하는 매끄러운 구(球) 형태의 조각품이다. 이 구 형태의 조각품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스무드'는 사람들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기 어렵다는 비유적인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던지는 것이다.
하물며, 나와 다른 사람들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의 삶을 한 번, 완전히 객관적인 시각으로 살펴보자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래서 소설의 서술자를 한국계 미국인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나'는 '듀이'라고 불린다. 그는 겉모습은 완전한 한국인이지만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자랐다. 그래서 '듀이'는 전혀 선입견 없는 상태로, 극우라 불리는 태극기 집회의 현장 안으로 아무런 선입견 없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편견 없이 관찰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불륜도, 어린 꼬마의 눈으로 서술되기에 미화되듯이, '스무드'는 미국인의 눈으로 객관적으로 관찰하기에 선입견 없이 태극기 집회의 모습을 관찰해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광화문 광장'을 '이승만 광장'이라고 부르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소리 지르는 이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상계엄까지 선포한 사람들을 옹호하는 그들의 생각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소설을 따라 나도 잠시 선입견을 내려놓고 '듀이'를 따라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것조차 불순하다고 말 한다면....., 그러한 생각이나 저들의 생각이나 같은 뿌리는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조금만 마음을 열고, 현재의 갈등을 치유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도, 저들이 왜 저러는지 조금은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눈 딱 감고, 이른바 '극우 할배와 할멈'이라 불리는 집단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그렇다. 사실 그들은 아주 평범한, 내 이웃에 사는 할아버지이고 할머니들이었다. 손주뻘되는 '듀이'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힘을 쓴다. 결국 '듀이'의 핸드폰을 충전해 주고, 먹을 것도 챙겨주는 마음 따뜻한 어르신들이다.
하지만, 다시 ... 그들의 경계 밖, 자신들을 향해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른다.
그것은 마치, 너희들은 우리들의 신성한 임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절규처럼 들린다. 나라를 자신들이 지킨다는 최후의 보루라고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자신들이 나서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절박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충심을 희화화하는 못된 것들을 향한 절규는 마침내 분노와 욕설로 이어진다.
그들은 한 때 이 나라 발전의 주역이었고, 존중받는 가장이었다. 그렇게 살아왔다고 또한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국제시장'과 같은 영화 속 주인공의 삶에 눈물을 짓고, 공감한다. 하지만 현재 이들의 삶은 초라하다. 세계 1위의 노인빈곤율과 자살율은 노인들의 비참한 삶을 잘 보여주는 수치이다.
많은 노인들이 폐휴지를 주으며 하루 생활비를 벌고, 또는 다리 밑이나 공원의 정자에 모여서 소일거리를 찾으며 어슬렁거리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버렸나?' 그때 누군가 한 곳을 가리킨다. 그곳에 우리들의 적이 있다고 함께 외친다.
사람들은 의미를 찾는 존재라고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의미를 찾기 어렵거나, 자신의 존재 의미를 알아주지 않을 때 절망하게 된다. 그래서 처절하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인정받으려고 투쟁을 한다.
그래서 이어지는 소설, '혼모노'나 '구의 집 : 갈월동 98번지'를 보면, 그러한 인간들의 인정 욕구와 투쟁심리가 처절하게 드러난다. 그건 단순한 투쟁이 아니라 목숨이나 자신의 모든 신념을 거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저들이 단순히 돈 몇 푼에 광장에 모여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절대로 아닐 것이다. 그건 저들의 삶의 의미를 처참하게 짓밟는 짓이다. 저들은 삶의 의미를 찾는 중이다. 그리고 같은 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은 강한 연대의식을 갖게 된다. 저들은 동지이자 전우들인 것이다. 그러니 그 구(球)의 세계 안에서는 그 누구보다 따뜻한 인간미가 넘친다.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일은 말로서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말로써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한들 그것은 어차피 잔소리일 뿐이다. 또한 변화시키고자 하는 이의 행동을 무시하는 것은 돌아올 수 없는 갈등의 씨앗이 될 뿐이다.
그러니 저들의 행동을 단돈 몇 만원에 영혼을 파는 파렴치한 짓으로 치부하는 것은 옳은 일은 아닌 듯하다. 저들은 지금 삶의 의미를 치열하게 찾고 있는 중이다.
그건 나나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