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개념 3
『마당을 나온 암탉』
『마당을 나온 암탉』은 동화(童話)이지만, 어른이 읽어도 좋은 훌륭한 책이다.
이야기 속에는 끊임없이 다양한 존재들의 ‘죽음’이 등장한다. 양계장에서 알을 낳지 못하는 닭은 쓸모가 다했다는 이유로 버려진다. 족제비는 새끼들을 먹이려고 매일 사냥에 나서고, 족제비에게 잡힌 오리들과 병아리들의 죽음이 이어진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도 담담할 수 없으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처절하게 몸부림친다. 죽음의 세계는 인간이 경험해 보지 않은 세계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인간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두렵기에 불안을 느낀다. 그게 인간의 속성이다.
그런데, '청둥오리'는 달랐다. 자신의 유일한 '알'을 품는 암탉, ‘잎싹’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 결말에서는 ‘잎싹’ 역시, 족제비의 사냥이 자기 새끼를 살리기 위한 모성(母性)이었음을 이해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토록 죽음을 대담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죽음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죽음 이후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확신이 있으면 두렵거나 불안을 이길 수 있다.
이러한 장면들은 철학과 종교에서 다루는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신념으로 독배를 마셨다. 감옥에서 탈출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고수했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 그와 함께 처형되었던 강도에게도 천국을 허락해 주었다. 사랑으로 자기 몸을 희생하고 바로 옆의 사람부터 온 인류를 구원했다.
‘잎싹’은 족제비에게 몸을 맡기며 갈갈이 몸은 찢겼겠지만, 영혼은 훨훨 날아 ‘하늘을 나는 꿈’을 이루었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성인으로 기억되고, 예수는 인류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죽음의 고통과 사망의 힘을 이겨낸 이들이 누리는 영광일 것이다.
사후 세계에 대한 관점
불교에서는 윤회(輪廻)를 말하며, 생명이 끊임없이 순환한다고 가르친다. 이승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지옥에 던져지기도 하고, 금수(禽獸)로 태어나기도 한다. 기독교는 직선적 세계관을 제시하며, 죽음 이후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뉜다고 말한다. 현실과 사후 세계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영원한 형벌을 받거나 천국으로 가느냐가 결정된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불교든 기독교든 죽음 이후의 세상을 위해 현재의 삶을 잘 살아야 한다는 숙제를 던진다. 대부분의 종교들, 유신론적 세계관 안에서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반면, 유물론적 세계관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고민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 되면 우리 삶에서 도덕과 윤리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면, 왜 도덕과 윤리를 지키며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니체 같은 철학자들이 깊이 고민한 주제이기도 했다. 그래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만약 지금 이 순간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너는 그것을 긍정할 수 있는가?”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던 그는, 인간이 현실에서 어떻게 자기의 존재를 긍정할 것인지 실존적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는 ‘영원회귀’(Eternal Recurrence) 개념을 통해, 신이 없는 세계에서도 인간이 왜 최선을 다해야 하는지 나름대로 신박하게 설명했다.
‘영원회귀’란 당신의 운명이 끊임없이 재생되는 영화처럼 영원히 반복된다는 개념이다. 영원히 반복되는 영화라면, 이왕이면 가장 뛰어난 명작, 누구나 보고 싶은 대작을 한 번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소설을 통해, 모든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강조했다.
우리의 짧은 인생이 단 한 번뿐이지만 영원히 반복되니 지금 이 순간 후회 없이, 이왕이면 행복하게 살라는 것이다. 『지대넓얕』이라는 책에서는 니체의 철학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 지금 이 순간이 힘겹고 고통스럽다면 그 고통은 영원할 것이다. 반대로 지금 이 순간이 즐겁고 행복하다면 이 행복은 영원할 것이다."
조금은 윤회론적 개념을 섞은 것 같기도 한 이 말은 어쨌든, 유신론자든 유물론자 모두에게 죽음의 문제가 관심 밖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닌 척, 죽음에 대해 대범한 척해도 내가 경험하지 않아 알 수 없는 사후세계는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불안한 인간은 어떻게든 그 불안을 해결하고 싶어한다.
최근에는 ‘근사체험’에 대한 EBS다큐 프로그램이 방영되기도 했다. ‘근사체험’을 두고 사후 영혼의 세계를 믿는 사람들과 함께 이를 부정하며 과학적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원리라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대립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아래 달린 댓글들이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그럴 듯한 이론을 가져와 설명해도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많이 사후 세계를 인정함을 알 수 있다.
① 아빠 보고 싶네.
② 모두 꿈을 꾸고 그것을 사후세계라고 한다.
③ 이렇게 어마어마한 우주를 만들 정도의 존재가 있다면 사후세계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④ 과학이란 게 시작된 지 100여 년이 좀 넘은 상태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신과 사후 세계 그리고 영혼. 이것은 믿음이라는 영역에서만 해결이 가능하기에 접근방법이 과학적, 학문적으로 간다는 것은 오답의 무한한 순환 속에서 답을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이 든다.
사후세계의 진실|근사체험|다큐프라임|#골라듄다큐/ 댓글 인용
사후세계는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공간으로 생각하며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복잡하고 거대한 우주를 보면서 전능자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도 있다. 과학이 지나치게 교만하면 안 된다며 경고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사후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냥 심장이 정지한 뒤 20초 정도의 뇌가 활동하며 만드는 착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냥 마취상태에서 꾼 꿈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은 자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죽음이 두려운 인간은 대개 죽음을 회피하는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잊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잊고 살다가도 언젠가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오면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것이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먹고 살기도 힘든데, 꼭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불안해 하며 고민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죽음의 문제는 현재 나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오히려 현실의 삶을 사랑하라는 경고와 성찰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라틴어로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같은 말이 유명하다.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마라’는 의미이다.
유물론자이든 유신론자이든 그 세계관 안에서 현재 나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다시 어디로 돌아가는가에 대한 인식은 역시 중요하다.
인문학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유신론적 세계관 안에서 천국을 믿고 절대자를 믿기에 신 앞에 홀로 서는 그 순간에 부끄럽지 않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