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위해 드리는 시
엄마는 저녁밥을 해서 방으로 들이고는
무슨 일이 있는지 들어오시지 않고
여기 저기 들러 이런 저런 일을 다 살피고서야 들어왔다.
그런 엄마를 보고 아버지는 핀잔을 자주 주었지만 더이상 뭐라고 하는 건 아니었다.
밥상 가져다 두고 매일 뭐하느냐고 ...
아무리 그래도 엄마는 그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엄마는 안방으로 밥을 들이고 강아지 닭, 돼지 소 같은 것들을 다 챙기고 들어오신 것이다.
아버지는 동네 반장이었고, 말이 반장이지 동네 머슴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시째 아버지였다. 이런 저런 궂은 일 챙기는 분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놀러 와 편하게 이야기하다 갈 수 있는 분이었다.
우리 식구 밥 먹는 아침이나 저녁 시간조차도 이웃집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서스럼 없이 찾아와 같은 방에 앉았고, 밥 먹었느냐고 물으면,
어여 먹으라고, 먹고 왔다고 아무렇지 않게 앉아 저녁상 앞에 두고 이런저런 말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밥상이 나가면, 사람들은 하나 둘 더 우리집으로 모이고
한 두 시간 이야기 꽃을 피우기도 하고,
윷놀이로 한바탕 한낮이나 밤늦도록 신나게 놀았다.
내가 자라는 유년의 시간동안 우리집 안방에는 한바탕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어릴 때, 시골집에 들렀던 도회지의 이모들은
하나같이 엄마가 힘들게 사는 게 안타깝다고 혀를 내두르셨다.
나중에 커서도 이모들은 나를 보고 꼭 한마디씩 말씀을 하셨다.
네 할머니는 이모들이 왔다 가는 것도 먹을 것 축낼까 아깝다며 걱정했다고.
그렇게 눈치를 주곤 하더라고.
그런 시어머니 밑에서 네 엄마가 고생 많이 했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고생했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고 살았다.
사실 엄마는 이모들 생각과는 달리, 할머니는 물론 동네 사람들과도
큰소리 한 번, 서운한 말로다 다툼을 잘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엄마가 한번도 화내거나 싸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금도 나는, 엄마가 그렇게 화를 내고 아버지와 대판 싸우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 엄마는 아버지의 머리털을 한줌 뽑아버렸다.
아버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아버지도 이 일을 두고, 술 한 잔 하시면 엄마와 자식들 들으라고 목소리를 높이셨다.
엄마도 성질 나면 사람들 머리털도 다 뽑을 수 있는 분이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우리 집에 사셨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 아버지 등에 업혀서 큰집으로 가셨다.
돌아가시는 건 큰 집이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평생을 우리 집에서 살았는데, 마지막 밤은 큰 집에서 숨을 거두셨다.
할머니를 장사지내던 날은 모든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어우러진 날이었다.
그리고 진짜로, 할머니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인 날에, 동네 축제처럼 저 먼길을 가셨다.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당뇨병을 갖고 계셨다.
그래도 사람 좋아하는 아버지는 막걸리를 한 잔 걸치는 날이 많았다.
아버지는 술 한 잔을 하시면, 멀리서부터 아들들을 크게 불렀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당신을 부축케 하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좋아하셨다.
가끔은 귀찮아도 아버지는 그런 날엔 500원짜리 지폐 한장도 기분 좋게 건넸다.
엄마는 병있는 양반이 무슨 술이냐고 했고,
그럼 아버지는 '먹고 죽은 구신은 때깔도 좋다'고 한 마디 하고는 기분 좋게 잠이 드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환갑을 겨우 넘기시고 정말로 깊은 잠에 들었다. 먼 길을 가셨다. 사실 그리 때깔 좋게 가시지는 못했다. 엄마는 그 뒤로 20년을 혼자 사셨다. 일찍 가신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하고 그리워하면서 지냈다. 그래서 아버지를 많이 닮은 나를 엄마는 더 찾으셨다. 나를 데리고 읍내 시장이나 밭으로 논으로 다니는 걸 좋아했다. 엄마는 주말이 가까워 오면 나에게 한 번 들렀다 가라고 자주 전화를 하셨다. 엄마는 내가 오는 시간에 맞추어 마당에 나와 기다리셨다. 마당 담벼락에 기대어 얼굴만 내밀고는 차에서 내리는 나를 바라보고는 활짝 웃고는 하셨다.
엄마의 시골집 부엌은 언제나 눅눅하고 어두웠다.
오랫동안 혼자 밥도 안 해 드셨는지, 아들이 오면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드느라 바빠지곤 하셨다.
하지만 나는 비위가 상하는지 입맛이 나지 않는다고 찬물에 말아 후루룩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했다.
그럼 엄마는 내가 배가 고파서 그러는 줄 알고 내 밥그릇에 당신의 밥을 퍼서 더 얹어주고는 했다.
엄마는 하룻밤 자고 급히 집을 나서는 아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다.
차를 타고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엄마가 보이지 않는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엄마의 그 끈끈한 눈길을 기억한다. 엄마는 내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서있었다.
엄마는 혼자서 살다가 치매를 앓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들 딸에게 전화를 했다.
하루에 삼십 통이 넘는 전화가 부재중 전화로 찍힌 적도 있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전화를 자주 하느냐는 아들의 잔소리에 내가 언제 그랬느냐고 ...
'미안허다'고 말하셨다. 그러다가 병원에 가셨다.
어머니가 병원에 계시던 때는 코로나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지만, 엄마는 신경안정제를 맞고 누워 있었다.
가끔 찾아 뵌 어머니의 눈에는 힘이 없었고 무슨 말도 쉽게 하지 못하셨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하지만 잘 들리지는 않고, 안으로 안으로 삭이는 말들 뿐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사시다가 코로나가 끝나는 해, 봄이 오기 전, 늦은 겨울, 아침에 돌아가셨다.
엄마를 땅에 묻던 날,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엄마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고. 법 없이도 살 양반이었다고.
그래도 참 고생 많이 혔다고 ...
찬바람을 견딘 것들이,
겨우내 나뭇가지 끝에서
많이도 흔들리고 얼어붙어 서럽고
외로웠던 것들이.
그리고 어머니의 말들이..
겨우내 병원에 묻혀 속삭였던 말들이.
무심한 말들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고,
차갑게 속닥대던 그곳에서
찬바람을 견딘 것들이, 외로웠던 엄마의 말들이
봄에 핀 꽃잎처럼
꽃의 속삭임은 그렇게 곰삭은 것을 골라 담은 말이어서
정답기도 하고 은은하게 취하는 맛이 있는데 ...
환하게 핀 꽃잎을
그 꽃잎을 흔드는 바람처럼
나는 이제 엄마를 보내네.
꽃잎이 남긴 잎싹이 되어
나는 축제처럼 엄마를 보낼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