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숭고한 아름다움의 순간을 들려주는...
재즈에서 피아노라는 악기를 떠올릴 때 수많은 연주자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가장 많은 사람을 재즈피아노의 매력에 빠지게 한 피아니스트가 있다면, 제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연주자는, 오늘 소개하는 바로 이 사람, 키스 자렛(Keith Jarrett)입니다. 그는 마음 깊이 파고드는 서정성과 영롱한 울림을 가진 로맨틱한 사운드를 들려주면서도, 때로는 듣는 이들을 완전히 낯선 새로운 세계로 이끌고 가는 깊이가 있는 연주자였습니다. 저는 언제나 그의 연주는 재즈피아노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그의 연주를 지금 당장 듣고 싶은 분들에겐 익숙한 멜로디가 담겨있는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https://youtu.be/AyLQGDIrGcI?si=R22RlZW8lFWXDf1E
오버 더 레인보우는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라는 영화의 주제곡으로, 32마디의 멜로디를 담은 짧은 곡입니다. 그런데 그 간단한 곡이 키스 자렛의 즉흥연주를 통해 흘러나오면, 마치 너무나도 완벽하게 작곡한 소나타 한 악장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아마 그의 연주를 처음 듣는 사람조차도,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담아 한음한음 새겨내는 그의 연주를 들으면 누구라도 한순간도 딴생각을 못하고 그의 연주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키스 자렛은 여러 다양한 형태의 밴드에서 연주를 했지만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났던 앙상블은 베이시스트 게리 피콕(Gary Peacock), 드러머 잭 드조넷(Jack DeJohnette)과 함께 연주한 피아노 트리오였습니다. 저는 2013년 UCLA 대학에서 열린, 그들이 함께 연주한 3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수많은 스타들이 인기를 얻었다 사라지는 굴곡 많은 공연예술계에서 30년 이상을 꾸준히 함께 연주하며 세계를 여행하며 음악과 삶을 나눈 세 남자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그들이 공연에서 마지막 앙코르곡으로 연주했던 곡의 제목 "When I Fall in Love"처럼 음악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그런 삶을 가능하게 했겠지요.
https://youtu.be/HIec-IAjc2U?t=15
키스 자렛의 가장 큰 업적은 솔로 피아노 연주를 새로운 경지로 이끌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재즈의 역사를 살펴보면 피아노는 공연의 중심이 되는 솔로악기보다는 트럼펫이나 색소폰 연주자를 돕는 반주악기로 여겨졌습니다. 간혹 피아노가 중심이 되는 연주라고 해도, 그 옆에는 늘 베이스나 드럼이 함께하는 트리오 구성으로 연주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습니다. 사실 연주자에게도 피아노를 솔로로 연주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 됩니다. 밴드로 연주할 때는 각 연주자가 조금씩 서로를 채워주며 부담을 나눠질 수 있지만, 솔로 연주는 자신을 가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혼자 서야 하기에 큰 부담이 됩니다. 아무의 도움도 없이 무대 위에서 하나의 악기로 관객들을 설득하고 매료시키기 위해서는 뛰어난 연주력과 함께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그때까지 재즈 피아노 솔로앨범은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도 않았고 대중적인 성공은 더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1975년, 키스 자렛은 독일의 쾰른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자신의 솔로 라이브 콘서트를 음반으로 발매합니다. 1시간 7분의 분량의 이 연주음반은, 이전의 그의 음반과는 크게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보통의 재즈공연은 기존의 널리 알려진 스탠다드 곡이나 자신이 작곡한 곡들 중 몇 곡을 골라서 진행합니다. 그러나 자렛은 이 공연에서 기존의 곡을 전혀 연주하지 않고,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리에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가지고 바로 즉흥으로 연주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음반의 곡 리스트를 살펴보면, 곡의 제목이 적혀있지 않고, Part I, Part IIa, Part IIb, Part IIc라고만 표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프리재즈나 일부 현대적인 클래식 음악에서도 이러한 시도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연이나 음반은 매우 실험적인 것들이었고 소수의 음악애호가들만 듣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키스 자렛의 이 역사적인 음반 "The Köln Concert"는 전 세계적으로 350만 장 이상이 팔리는 엄청난 대중적인 성공을 이뤄냅니다. 이러한 음반의 판매량은 재즈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솔로 피아노 음반기록이면서, 더 나아가 클래식음악을 포함한 모든 장르를 통틀어 피아노로 연주된 음반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 중 하나라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이 공연에서 키스 자렛이 즉흥연주한 모든 음들은 전곡이 채보되어 악보로 출판되어 많은 클래식 연주자들이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https://youtu.be/_9oncyqXgzU?si=RpsJ8wrxGLVdf82M
이렇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역사적인 라이브 연주 실황이었지만, 공연의 뒷이야기에 따르면 준비상황은 훌륭함과는 전혀 거리 멀었습니다. 공연 때 사용하기로 되었던 피아노는 운반사고로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상태가 좋지 않은 연습용의 작은 피아노로 연주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연주자인 키스 자렛은 연주여행의 피로로 인해 건강상태가 좋지 못했는데, 마침 레스토랑에서도 문제가 생겨 공연직전 제대로 식사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렛은 아무래도 연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공연을 취소하려 했는데, 기획자가 간신히 설득해 공연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런 명연이 나온 것을 보면, 최고의 성취가 꼭 최상의 조건에서 이뤄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키스 자렛의 음반을 듣거나 혹은 공연을 보면 이상한 신음소리 같은 것을 들을 수도 있고 독특한 몸의 움직임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연주에 몰입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온몸을 뒤틀거나 입으로 자신의 연주를 따라 부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공연을 처음 보는 분들 중에는 약간 놀라거나 낯설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음악을 듣다 보면, 그 어떤 상황에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청중이 즐기기 이전에 자신이 만족하는 음악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몸짓과 허밍조차도 자렛의 연주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키스 자렛은 발매한 음반도 아주 많고, 각 음반마다 매우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연주자입니다. 전통적인 연주에서 현대적인 연주까지, 심지어 바흐, 모차르트를 포함한 클래식 음악까지 몇 단락의 짧은 글로 담기에는 너무나 큰 피아니스트라고 해야 할 겁니다. 그는 여전히 생존해 있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2018년에 전에 찾아온 두 번의 뇌졸중으로 현재는 연주와 음반활동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다시 대중들을 위해 연주할 날을 기대하며, 아직 기능이 남아있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집에서 음악동료들과 종종 연주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렛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아름다운 연주는 멈추지 않을 것을 믿으며, 다시 무대에 서겠다는 그의 바람이 꼭 이루어지길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