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연주의란

by 서운인혜

자연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쓴 글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근대 이래 인간 중심의 사유는 자연을 단순한 자원의 집합체로 바라보았다. 특히 근대 철학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데카르트주의적 세계관은 자연을 기계적 질서로 환원하였다. 데카르트는 자연을 ‘연장된 실체(res extensa)’로 규정하며, 그 모든 현상을 기계론적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은 인간 이성의 탐구와 지배의 대상, 곧 통제와 활용을 위한 객체로 간주되었고, 이는 근대 과학혁명과 산업화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적 자연관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것이 '생태주의(ecologism)'이다. 생태주의는 자연을 단순한 수단이나 배경이 아닌,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와 권리를 지닌 존재로 본다. 특히 생태주의는 생물뿐 아니라 무생물, 나아가 지구 자체에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이 어머니인 자연을 함부로 지배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는 급진적 윤리관으로 이어진다. 현대에 대두된 포스트모더니즘과 결합한 급진적 생태주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위계적 구분을 해체하고, 인간이 자연의 ‘목소리’를 대신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태주의는 인식의 개선을 넘어 인류 전체에 인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현대 생태윤리 담론에서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자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듯 보인다. 예컨대 일부 생태주의자들은 특정 종의 멸종을 막고, 삼림과 습지를 보호하며, 기후 변화를 완화하는 정책이 단지 인간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연 자체의 고유한 권리를 보장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먼저 자연 자체의 권리 개념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인식 범위를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예컨대 지구 온난화 논의에서 기후 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생태계 교란, 식량 생산 감소가 인간 사회에 위협을 준다는 사실은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기온 상승이 지구라는 행성 자체의 ‘선익(善益)’을 훼손한다는 판단은 결국 인간의 관점과 가치 평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자연이 환경의 문제 앞에서 스스로 고통을 호소하거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인간의 인식 범위 밖에 있다. 또한 생태주의는 도덕적 책임의 주체를 인간으로 설정하면서도, 자연에게 모호한 절대적 권리를 부여한다. 그런데 절대적 권리의 실질적 부여자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모순을 가져온다. 예를 들어 개발을 중단하고 특정 보호종의 서식지를 지키자는 주장은 ‘그 종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그것을 보존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연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의 도덕적·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연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인간은 알 수 없기에, 결국 생태주의적 담론은 인간의 가정과 상상에 기초하게 된다. 생태주의는 인간 중심적 자연관을 극복하고자 하나, 그 핵심적 주장 자체가 여전히 인간의 시각과 가치 판단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자기모순을 안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생태주의적 인식 전환의 주체가 인간인 이상, 생태주의가 지향하는 인간을 초월한 권리 개념에 도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결합한 급진적 생태주의는 입법과 정책의 영역에서도 유익하기 어렵다. 입법은 명확한 개념 규정과 객관적 타당성을 필요로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개념을 해체하고 상대화하며 진리를 권력 담론으로 환원시키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환경보호를 위해 어떠한 규제를 정당화할 것인지, 인간의 자유를 어떤 기준에서 제한해야 하는지에 대한 법적 근거를 모호하게 만든다. 자연의 권리를 근거로 개발을 일률적으로 규제한다면, 이는 인간 사회의 안전과 공익을 위한 환경법 체계를 구성하기보다는, 인간의 이성적·과학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입법을 상징적 선언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 실제로 이성이 결여된 생태주의적 정책의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로, 인도 북부 우타르칸드 주의 무분별한 숲 보호 정책을 들 수 있다. 이 지역은 생태 보전을 이유로 모든 벌목과 간벌을 전면 금지했으나, 관리되지 않은 숲은 지나치게 밀집되어 고사목과 건조 낙엽이 쌓이게 되었고, 작은 불씨에도 대형 산불로 번지는 구조적 취약성을 초래했다. 2016년과 2020년 반복된 대형 화재로 토양 생태계가 크게 파괴되고, 수천 명의 주민이 대피를 강요당했다. 자연을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는 관념이 오히려 숲의 회복력과 지역 공동체의 안전 모두를 위협한 것이다. 이 사례는 생태주의적 이상주의가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해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칸트의 이성적 자연관은 생태주의와는 전혀 다른 접근을 취한다. 그는 『판단력 비판』에서 인간을 “자연의 법칙을 인식하고 그것을 목적론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칸트는 인간이 자연을 연구하고 활용할 수 있는 이성적 주체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무제한으로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은 자연을 존중하고 보존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지닌 존재로 보았다. 이러한 칸트의 자연관은 데카르트주의가 가진 ‘자연의 단순 수단화’를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극단적 생태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초래하는 비합리적 자연관으로부터도 벗어나게 해준다. 칸트의 자연관은 인간 이성이 자연을 무조건 지배하라는 데카르트의 사유와 구별되며, 인간 이성을 해체하고 자연을 숭배 대상으로 만드는 급진적인 생태주의·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와 대척점을 이루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칸트 이전에 존재해 온 성경의 자연관에서 진정한 자연주의에 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성경의 자연관은 이성적 자연관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더욱 근원적인 차원에서 정의한다. 창세기 1장 28절은 아담과 하와에 대한 창조주의 명령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생태주의는 이 구절을 인간의 자연 착취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비판하지만, 본래 이 말씀이 의도한 바는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오히려 그다음 장면에서 아담은 자연의 생물들에 이름을 붙이며 자연을 돌보는 존재로 표현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그러므로 창세기의 자연관은 인간이 자연을 돌보고 보살피며, 그 안에서 모든 생명이 번성할 수 있도록 관리할 책임을 지닌 존재임을 시사한다. 칸트가 이성적 의무로서 자연보호를 말했다면, 성경은 훨씬 이전부터 자연을 돌보고 사랑하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사명을 선포했던 것이다. 또한 성경의 관점은 생태주의자들이 표방하는 자연 사랑의 이상과 부합하면서도 그 출발점이 인간의 책임의식과 창조주와의 관계 인식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극단적 생태주의는 자연을 숭고한 대상으로 절대화하는 듯 보이지만, 이성과 합리성을 결여한 주장으로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무엇이 진정한 자연주의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창세기의 자연관은 인간이 자연을 다스릴 책임을 지닌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할 때 비로소 환경 문제를 진정성 있고 지속 가능하게 논의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참된 사랑이며,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되 함부로 하지 않는 ‘진정한 자연주의’의 시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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