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여기저기 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립니다. 지난주에는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운동회를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하고 기억하는 운동회 장면이 아니었어요. 학년별로 정한 날에 체육관과 운동장에서 놀이 중심으로 하고 있었지요.
어떤 학년에서는 외부에서 온 행사대행업체 사람들이 행사 용품을 가져와 조직적으로 진행하거나 돕기도 했습니다. 저는 수업이 없는 시간에 구경하러 갔습니다. 구경꾼이라고는 저와 수업이 없는 몇몇 선생님, 그리고 교장, 교감 선생님뿐이었지요. 모두 운동회를 특별한 행사로 기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대에 찬 표정으로 구경하는 사람들과 달리 참여하고 있는 아이들은 운동회를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적인 교육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점심도 특별할 것 없는 학교급식을 먹었어요. 그러다 보니 예전 운동회와는 규모나 내용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지요.
아마 40대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서 가을 운동회에 대한 기억들을 소환하여 그 무용담을 이야기한다면 하루종일해도 다 못할 것입니다. 가을 운동회는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초등학교 시절을 대표하는 추억 중의 하나니까요. 저는 운동회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종목인 큰 공 굴리기와 줄다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제 입꼬리가 올라가지요. 저는 국민학교 6년 동안 운동회에서 공책 한 권 못 받았지만, 힘세고 빠른 친구들 틈에서 신나게 즐길 수 있었던 종목이었기 때문입니다. 운이 좋으면 저도 승자로서 당당하게 만세도 불렀지요. 또 1학년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번지는 꼭두각시춤도 아이들이 입었던 색동옷만큼이나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교사였을 때는 주로 단체 공연 종목인 부채춤과 소고놀이를 지도했습니다. 대학에서 배워 익힌 것을 전통을 고수하며 고민없이 지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게으른 제게 잘 맞았지요. 매스게임 등의 현대무용은 매년 사회적 이슈나 유행에 따라 안무를 달리 구성해야 하니까 담당교사는 해마다 새로운 내용을 연수받거나 교사들끼리 협업하여 준비해야 했거든요. 하지만 부채춤, 소고놀이, 꼭두각시 등은 몇 해를 똑같은 내용으로 준비해도 늘 박수갈채를 받는 인기 종목이었습니다.
과거의 운동회는 연습 과정이 길고 아이들 개인이 참여하는 종목도 많았지요. 학교에서는 여름방학이 끝나면서 운동회 연습을 시작했어요. 서늘하고 어둑한 기운이 운동장에 드리울 때까지 여자아이들은 강강술래, 부채춤, 소고놀이, 매스게임 등을 연습했습니다. 남자아이들도 곤봉체조와 인간 피라미드 쌓기, 기마전, 차전놀이 연습에 날이 저무는 줄도 몰랐던 일이 생각납니다. 길고 힘든 연습 시간 때문이었는지 운동회 당일에 공연을 마치고 나면,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들도 큰일을 해냈다는 후련함과 함께 허탈한 기분이 들었지요.
그리고 운동회를 준비하면서 꽤나 신경을 썼던 것 중 하나가 점심시간을 알리는 '박 터트리기' 경기에 쓸 바구니 속에 넣을 두루마리와 용진문에 쓸 구호였습니다. 1980년대 만해도 운동회 자체에 중점을 둔 것보다 시대적인 상황과 정책적인 내용을 반영하여 문구를 만들었던 것 같아요. 선수들이 경기를 하기 위해 운동장으로 나가는 용진문에는 초등학생인 아이들의 발달 수준과 만국기가 펄럭이는 잔치 분위기와 맞지 않게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군대의 그것처럼 묵직한 구호들이 붙어 있었지요.
점심시간까지 진행되는 1부 프로그램의 마지막 순서는 어느 학교나 똑같이 '박 터트리기' 경기였지요. 운동회날에 쓰일 박을 만드는 것은 운동회 준비의 맨 마지막에 하는 일이었습니다. 먼저 청군과 백군으로 나뉜 선생님들이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 두 개씩 받아서 경쟁하듯 각각 흰색과 파란색 종이를 붙입니다. 그리고 장대에 고정될 위쪽 바구니에 세로로 글씨를 쓴 두루마리를 둘둘 말아서 고정하고, 꽃가루처럼 보일 색종이를 잘라서 넣지요. 그다음에 나머지 바구니를 덮어 맞붙이면 됩니다. 어떤 학교에서는 색종이와 함께 비둘기를 바구니에 넣기도 했지요. 이때 바구니를 맞붙여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운동회 연습 기간의 성적을 반영합니다. 아이들이 연습할 때 콩주머니로 박을 잘 맞혔다면 쉽게 터지지 않게 넓은 종이로 꼼꼼하게 붙이고, 잘못 맞혔으면 쉽게 터지도록 종이를 가늘게 잘라서 붙였지요. 이것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면 시작하자마자 박이 터져 버려서 김 빠진 경기가 되고 말지요.
아이들이 던진 콩주머니에 맞고 박이 터지면, '맛있게 드세요' 또는 '혼식으로 부강 찾고, 분식으로 건강 찾자'라는 구호가 적힌 두루마리가 펼쳐지면서 점심시간이 되었음을 알렸습니다. 운동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박 터트리기 경기에 주목하며 응원하다가, 박이 터지고 색종이 가루가 흩날리는 순간,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점심시간은 학교 운동회를 잔치마당으로 자리매김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였지요. 어른들은 가족과 이웃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아이들을 불러들여 격려하고 칭찬하며, 특별한 간식과 음식들을 준비해서 이웃들과 나누어 먹으면서 함께 즐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회의 백미로 치는 경기는 아마 이어달리기라고 하는 계주일 것입니다. 운동회의 마지막 경기지요. 구경하는 사람까지 손에 땀을 쥐게 했던 계주 경기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끝이 나면, 운동회도 막을 내리립니다. 만국기가 펄럭이던 파란 가을 하늘 높이 울려 퍼지던 함성이 아직도 들려오는 듯합니다.
제가 앞에서 추억한 것은 대략 1990년대까지의 운동회였습니다. 학교와 교사가 주도적으로 운동회를 계획하고 운영했던 시기지요. 이때의 운동회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가 교육공동체로서 함께 즐기는 잔치나 축제로 기억할 것입니다. 또한, 그 기억 속에는 가족과 지역사회와의 끈끈한 유대감에 대한 짙은 향수도 남아 있을 거예요. 그리고, 운동회 때만큼은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도 당당했던 평등한 놀이문화에 대한 추억도 아련하게 떠오르겠지요.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면서 운동회는 학교 안팎에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교사의 업무 부담이 과중하다는 것, 매년 비슷한 프로그램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 연습으로 인한 수업 결손이 많다는 것, 학교의 시설과 용구가 변화하는 운동과 놀이 문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 보여주기 위한 행사라는 것 등의 비판이었지요. 그러면서, 운동회는 점점 다른 양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운동회 전문 이벤트 업체까지 등장하여, 이른바 외부협력형 운동회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이 운동회는 연습시간이 따로 필요하지 않아서 선생님이나 아이들의 연습 부담을 덜고, 수업 결손도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요. 또 많은 아이들이 어렵지 않게 참여할 수 있고 흥미 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며, 개별 학생의 참여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아진 것들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학교는 물론 선생님과 아이들, 학부모들도 외부 협력형 운동회를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운동회 연습을 통해서 얻게 되는 아이들의 체력 향상과 공동체 의식의 함양 등은 예전 방식의 운동회에 비해 낮아졌지요. 또 예산을 과도하게 지출한다는 약점도 있고요.
요즘 운동회 날에도 운동장에는 여전히 만국기가 펄럭이고 아이들이 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운동회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성취감, 전통의 계승, 규율과 통제성의 의미들은 약화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전통이나 문화의 변화는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농산어촌의 학교들은 학생수의 감소로 엄청난 교육 환경의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이제는 학부모들이 기억하는 집단 체조나 단체 경기, 고전무용 등을 할 수 있는 인원조차 안 되는 학교들이 대다수인 것이 현실이지요. 그리고, 학교 운동회가 아니더라도 지역사회의 잔치나 축제, 놀이마당이 넘쳐납니다. 또 이것들은 과거 운동회가 가졌던 일부 기능을 충분히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운동회 운영 방식의 선택은 학교구성원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학교와 지역사회의 특성을 고려하여, 교육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를 지키며, 운동회 본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