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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우주 Sep 17. 2023

전주, 빛나는 오늘을 꿈꾸었던 도시

여고동창 7인의 회갑여행 -제9화-

군산에서 전주까지는 한 시간이 채 안 걸렸습니다. 남들 일하는 평일에 여행하는 것은, 가는 길과 장소마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한가롭다는 것이 큰 장점이지요. 저는 전군가도(전주시 덕진구 조촌교차로 ↔  군산시 팔마광장오거리, 길이  34.4km의 왕복 4~6차도) 달릴 때마다 '-전-군-가-도-'가 떠오릅니다. 그때 숙희가 '-전-군-가-도-'라고 표현한 것은, 마치 달리는 듯한 사실감과 속도감을 나타낸 것으로 출처는 장순하 님의 <고무신>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친구들은 우리가 함께 배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고무신>에서처럼 에 눈이 내리면 정말 그 어디쯤에서 외딴집이 보일까, 그리고 그 집 섬돌에 있던 고무신 세 켤레의 주인공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며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휙휙 지나는 전군가도는 한여름이 비껴 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전주는 정말 특별한 곳입니다. 우리들은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백수 장미 클럽 여덟 명 중에서 네 명이 전주에서 대학을 졸업했지요. 정임이는 광주에서, 숙희는 공주에서 대학을 다녔고, 영주와 마리아는 대학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친구들 중 유일하게 미숙이가 전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미숙이는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를 떠난 적이 없지요. 미숙이는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0여 년 전에 명예퇴직 후 남편과 함께 한옥민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여행 일정이 관광 성수기와 겹쳐서 미숙이가 함께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들이 내려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미숙이네 한옥에서 머물 예정이었습니다.



미숙이네 집 골목에 들어서자, 한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손을 흔들고 서 있는 게 보였습니다. 정선생이었습니다. 반갑게도 대문밖까지 마중을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선생은 은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겨 한 뼘쯤 되는 꽁지머리로 묶고 있었습니다. 정선생은 꽁지머리 빼고는 몇 전에 만났을 때와 거의 달라진 게 없는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정선생이 정중하게 공수 인사를 하고 자동차 트렁크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능숙하게 짐을 내리는 것을 보며, 친구들이 저마다 인사를 건넸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선생님, 꽁지머리가 어울려요. 브래드 피트가 무색하겠는걸요!"

"어머나, 한복이 잘 어울리세요. 언제나 봬도 멋쟁이세요."

"헤이, 동기 샘, 이제는 사장님 필이 팍팍 납니다."

미숙이네 한옥민박은 규모가 제법 커서 단독 한옥 채와 안채에 딸린 객실이 여섯 개나 있었습니다. 우리 친구들이 가끔 전주에 가면 미숙이와 함께 안방을 차지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정선생은 관리실로 쓰는 문간방에서 따로 잠을 잤지요. 하지만 이날처럼 한꺼번에 많은 친구가 미숙이네 한옥을 간 적은 없었지요. 정선생은 우리들에게 동편에 있는 독채를 쓰라고 안내했습니다. 독채는 방 두 개와 욕실이 있고,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아놓은 툇마루가 길게 놓인 구조였습니다. 부엌은 따로 없어서 살림집이 아니고 숙박만 가능하게 지어진 한옥이었지요.


우리는 방에 들어갈 생각도 없이 툇마루에 앉아서 뜨거운 볕이 내리쬐는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당가에는 봉숭아꽃과 분꽃, 채송화가 시들시들하게 늘어져 있었지요. 그때, 미숙이가 식혜를 담은 물통과 잔을 포개어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정선생이 큼직한 전주 창방복숭아를 들고 뒤따라 와서 툇마루에 내려놓고 되돌아갔습니다.


"정선생님 뒷모습은 여전히 쓸쓸하다."


숙희가 관리실로 들어가는 정선생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말했습니다.




정선생숙희는 국어교육과에서 함께 공부한 대학 동기입니다. 숙희가 3학년이 되던 해에 정선생은 군복무를 마친 복학생이었어요. 그리고, 그해 미숙이는 교육 대학을 졸업하고, 전라북도 무주군에 있는 초등학교에 발령받아 학교 사택에서 살게 되었지요. 토요일이면 전주로 돌아온 미숙이는 숙희와 자주 만났는데, 그 틈에 정선생과 인연이 되었던 것입니다.

[출처: 시사IN, 1989년 5월 28일 한양대학교에서 열린 전교조 결성식에 참석한 교사 연행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제공]



정선생이 졸업 후에 경기도에 있는 중학교에 발령받았고, 그해 겨울에 미숙이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전교조가 태동하던 시기부터 정선생이 가담하여 활동을 시작했지요. 정선생교육 민주화와 참교육 실천에 앞장선 선생님들과 함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결성했습니다. 이때 전교조 교사 47명이 구속되고, 정선생을 포함한 교사 1,794명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리고 노태우 정권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선생님들에게 전교조 탈퇴 각서를 요구했지요. 탈퇴 각서를 거부한 교사 1,527명은 해임되었습니다. 이때, 정선생전교조 해직교사가 되고 말았지요. 미숙이는 갑자기 시댁식구들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학교에서는 전교조 해직교사의 아내라는 따가운 눈총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정선생은 해직 기간 동안 낮에는 간간이 공사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사이에 아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아이를 보살펴 주던 시어머니는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김영삼 정권의 ‘조건부 복직’ 방침에 따라 정선생도 1994년 교단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원상회복의 복직 형태가 아니라 신규 채용 방식이었지만, 정선생은 집안 형편 때문에 복직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이듬해 학교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정선생은 그토록 사랑하던 아이들과 교단을 떠난 뒤, 한동안 아들을 돌보며 미숙이에 의지하여 살았지요. 다행히 부모에게 물려받은 집이 정선생의 삶에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비록 낡은 한옥이었지만, 마당이 넓고 텃밭까지 있어서 좋은 소일거리가 되었지요.  



그러던 중, 2002년에 전주한옥보존지원조례가 제정되었습니다. 정선생은 그 조례 덕분에 한옥 개·보수비를 지원받아 교동 끄트머리에 있던 집을 헐고 넓은 마당과 텃밭에 새로 한옥 세 채를 지었습니다.이어서 전주를 전통문화중심도시로 육성하는 정책이 추진되고 '지속가능한 마을'로 선정되면서, 뜻밖에 정선생과 미숙이는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지요. 이후 2010년에는 전주시가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되고,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되는 등 국내외에서 새로운 관광지로 각광받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미숙이네 한옥은 사업성이 부각되기 시작했지요. 그후 미숙이네 한옥민박은 일취월장하여 정선생이 혼자서 운영하기가 벅찬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교감 승진을 앞두고 있던 미숙이는 고민 끝에 학교를 그만두었지요. 그리고 남편 정선생과 함께 10년 넘게 한옥민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늦여름 햇볕이 툇마루까지 달구어 더는 앉아 있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우리들이 햇볕을 피해서 방으로 들어가 누웠을 때, 안채에서 옹배기 두 개에 담은 비빔밥을 점심으로 내왔습니다. 정선생과 함께 옹배기를 들고 온 사람을 시누이라고 미숙이가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손맛 좋은 시누이가 주방을 맡은 덕분에 미숙이네 한옥민박은 입소문을 타고 전국 각지에서 예약 문의가 쇄도한다고 자랑했습니다. 우리는 주방에 있는 재료만으로 간단하게 차렸다는 비빔밥을 먹어보고 그 말이 맞다고 칭찬했습니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낮잠을 자고 일어나 한옥마을 구경에 나섰습니다.


[전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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