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우리는 한옥마을 산책에 나섰습니다. 관광객이 없는 호젓한 골목길을 걸으며 비로소고향에 온 것 같다는생각이들었지요. 산책 길에 최명희 문학관에도 들렀습니다. 이른 시간이라 문이 닫혀 있어서 대문 안쪽 전시관에는 못 들어가고 바깥 마당에 머물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미숙이네 한옥민박 안채에 있는 대청마루에서 늦은 아침밥상을 받았습니다. 미숙이네 밥상은 정갈하고 맛깔스러운 것이 우리가 호들갑을 떨며 감동하기에 충분했지요.
우리는 미숙이 남편 정선생의 배웅을 받으며 한옥마을을 떠났습니다. 오늘 첫 여정은 전주에서 모악산(母岳山)을 넘어 금산사(金山寺)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친정집에 들러서 점심을 먹기로 했지요. 그 후, 아리랑 문학관을관람하고, 부안군 격포 해변까지 가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계획했습니다.
전주에서 남쪽으로 나가 완주군 구이면을 거쳐 모악산을 넘어가는 길은 왕복 2차선의 구불구불한 산길이 이어져 천천히 운전해야 했습니다. 은옥이 차에 타고 가던 마리아가 전화했습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길 내리막에 귀신사가 있는데, 그곳에 들렀다가 간다고 했습니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에 있는 귀신사(歸信寺)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귀신 귀(鬼), 귀신 신(神)으로 쓰는 귀신사(鬼神寺)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귀신사는 돌아올 귀(歸), 믿을 신(信)을 써서 ‘돌아와 믿는다’는 뜻이지요. 귀신사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금산사의 말사(末寺)입니다. 말사(末寺)란 본사(本寺)의 관리를 받는 작은 절을 이르는 말입니다.
[ 출처: doopedia.co.kr, 귀신사(歸信寺) ]
마리아가 귀신사를 들러서 가자고 한 데는, 작가 양귀자 님과의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가 양귀자 님과 서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에요. 양귀자 님과 마리아가 같은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마리아가 아는 것뿐이지요. 양귀자 님은 공부 잘하고 글도 잘 쓴다고 동네에서 소문이 났어요. 그리고 마리아가 중학생일 때, 양귀자 님은 4년 간 등록금이 면제되는 문예 장학생으로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 후로 마리아 엄마는 '귀자 언니를 본받으라'라고 말하며 마리아를 닦달했답니다. 그래서 마리아도 막연하게 작가가 되어 볼까 하는 꿈을 가진 적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고3 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일찍 돈벌이를 시작했지요.
마리아는 한 때 선망의 대상이었던 동네 언니 양귀자 님이 귀신사 어디쯤에서 영감을 얻어 소설에 썼는지 궁금하다는 것이었지요.양귀자 님이 소설 『숨은 꽃』에서귀신사를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라고 표현했다는 것도, 그때 마리아가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작가가 되고 싶었던 소녀 시절의열망을 끌어안은 듯 팔짱을 끼고 귀신사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다녔습니다. 귀신사는 작지만 고요함과 그윽한 분위기가 사색하기 좋은 절이었습니다. 또 절에서 바라보는 건너편 마을의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 출처: 금산사 홈페이지 ]
귀신사에서 금산사까지는 약 10분 정도 걸렸습니다. 전라북도 모악산 도립공원 입구에 절이 있어 주차장에서 절까지 가는 길에는 모악산을 등반하는 사람들도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지요.천년 고찰답게 입구에서 절까지 가는 길은 수백 년 된 고목들이 양쪽으로 서 있고, 모악산 계곡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길을 따라서 흐르고 있었습니다.맑은 영혼을 지닌 수행자가 걸어갔을 그 길에서 우리도 짧은 묵언 수행을 해보았습니다.
금산사(金山寺)는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에 있는 조계종 제17교구 본사(本寺)로 절터가 매우 넓고 규모도 컸습니다. 절에 있는 3층 건물인 미륵전(彌勒殿)이 조선시대의 불전으로 국보 제62호라는데, 고건축물에는 문외한인 우리들 중 국보로서의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최근에는 템플스테이로 유명해져서 산사의 정취와 자연 속에서 쉬고 싶은 사람들이 금산사를 많이 찾는다고 했습니다. 절 마당에 들어서자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사람들이 편안한 유니폼을 입고 넓은 마당을 삼삼오오 걷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절 주변의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숲 그늘에 있는 평상에 누워서 쉬었습니다. 저는 템플스테이에 참가하여 고즈넉한산사 분위기에 빠져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금산사에서 출발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지났습니다. 제 친정엄마는 팥죽을 끓여 놓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친정엄마는 용케도 제 친구들의 이름과 얼굴을 가물가물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진하고 달달한 팥죽을 두 그릇씩이나 먹고 일어섰습니다. 정임이가 남은 팥죽을 챙겨서 삶은 옥수수와 함께 차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은 제 친정엄마에게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뜻을 담은 '복돈'봉투를 안겨주고 집을 떠나왔습니다.
동지가 아직 먼 여름날, 때 아닌 새알팥죽을 끓여 달라고 해서 먹게 된 것은 우리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던 추억 때문이었습니다. 제 친정엄마의 팥죽은 우리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부터 유명했습니다. 진한 팥물도 일품이었지만, 김제평야에서 난 찰진 찹쌀가루를 익반죽 해서 만든 부드럽고 쫀득한 새알이 든 친정엄마의 새알팥죽은 언제나 최고의 맛이었지요. 전라도의 팥죽은 설탕을 넉넉하게 넣어 달달하게 끓이는데, 이미 끓여낸 팥죽에 설탕을 넣어서 먹는 것과는 다른 맛이지요. 가끔 팥죽 맛집이라고 해서 찾아가 봐도 그 맛을 제대로 내는 팥죽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친정엄마는 큰 가마솥에 팥죽을 자주 끓였습니다. 그리고, 팥죽을 끓일 때마다 들통에 퍼 담고 쏟아지거나 새지 않도록 뚜껑을 고무줄로 꽁꽁 묶은 다음 보자기로 한 번 더 단단하게 싸서 버스 정류장까지 들어다 주었어요. 그런 날은 반 아이들이 도시락에 팥죽을 퍼서 먹느라고 교실이 온통 난리였습니다. 가끔은 학교에서 가까운 마리아 집으로 가져가서 우리끼리 배가 터지도록 먹었지요.
언젠가는 지리 선생님이 저희 집 팥죽을 꼭 먹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달란다고 하니 영광이라면서 엄마는 특별히 예쁜 보자기에 팥죽을 싸서 주었습니다. 지리 선생님은 또 가정 시간에 제가 수놓은 두 폭짜리 가리개도 욕심냈습니다. 제가 바느질을 잘하고 수를 곱게 놓았거든요. 졸업 30주년 행사에서 고운 할머니가된 지리 선생님을 만났을 때, 팥죽과 자수 가리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이야기해서 깜짝 놀랐지요.
저에게 김제평야는풍요롭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 곳입니다. 지평선이 보이는 평야는 겨울의 빈 들판에 서 있어도 배가 부른데, 낱알이 영글어가는 늦여름의 들판은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제 고향이 김제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지평선이 보인다는 그곳, 정말 넓더군요. 부자였겠어요?"
제 친정에서 나와 40분쯤 달려서 너른 들판 한복판에 있는 조정래 아리랑 문학관에 도착했습니다. 평일이라 그런지 관람객이라고는 우리밖에 없어서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었지요. 소설 『아리랑』의 이야기는 전라북도 김제평야에서 시작하지요. 그리고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 러시아의 사할린과 중앙아시아벌판, 상해의 임시정부에 이르는 방대한 지리적 배경을 두고 있습니다. 소설은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穀倉)이었던 징게맹갱(*김제 만경)을 배경으로 일제 수탈과 강제 징용, 소작쟁의, 독립운동 등 구한말부터 해방기까지의 역사와 농민들의 애환을 그리고 있지요. 또한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그리고 일본이 패망하기까지의 시간적 배경을 다룬 이 작품은 암울했던 격동기의 민초들이 겪는 고초와 민족적 상황, 일제의 수탈과 착취, 그리고 친일파들과 애국지사들의 삶들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2권에 이르는 대하소설이지만 흥미 있게 읽을 수 있지요.
특히제4 전시실에있는 『아리랑』육필 원고의 까마득한 높이를 보고, 조정래 님의 작가로서의 노력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조정래 작가는 『아리랑』을 집필하기 위해서 중국 2회, 미국 3회, 동남아시아 3회, 러시아 2회, 일본 3회의 취재 여행을 했다고 합니다. 작가가 취재하러 다닌 거리를 전부 이어놓으면, 지구를 세 바퀴 이상 돈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작가는『아리랑』을 집필하는 동안 위궤양을 비롯하여 오른쪽 어깨의 마비증세 등의 신병까지 앓았다고 합니다. 전시실의'글감옥에서의 가출옥'이라는 코너가 전달하는 극한의 집필 작업을 상상하며,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 출처: 한국관광공사, 조정래 아리랑 문학관 ]
그리고, 우리는 조정래 아리랑 문학관에서 이어지는벽골제(碧骨堤)로 갔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이며, 고대 수리시설 중 그 규모가 가장 크다고 국사시간에 배웠던 것같습니다. 벽골제는 김제시 부량면의 평지에 5.6m 높이로 약 3.3km에 이르는 제방을 쌓았다고 하니, 백제 시대의 축조 기술과 벽골제의 규모를 짐작할 만했지요. 그래서 전라도를 일컫는 호남지방의(湖南地方)의 호(湖)가 바로 벽골제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랜만에 지평선이 보이는 평야에 서서 눈이 시원해지는 풍경을 실컷 보았지요. 우리들은 포만감과 더위에 나른해진 채로 벽골제에서 한 시간 정도 길을 달려 부안에 도착했습니다. 해는 이미 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해변에 도착했을 때, 마침 빨간 불덩이 같은 해가 바다로 빠져들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운이 좋게도 보기 드문 일몰 광경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