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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우주 Oct 26. 2023

1979.10.26. 강제 종료된 79학번의 1학년

1979년 10월 27일 아침, 제가 잠에서 깨었을 때는 대한민국이 이미 발칵 뒤집혀 있었습니다. 저는 바로 어제저녁뉴스에서 삽교천 방조제 완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의 건재함을 분명히 보고 잠들었지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났더니 온 나라가 대통령 서거 소식으로 뒤숭숭한 거예요.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인사말, '밤새 안녕하십니까?'를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곱씹었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저에게 바깥에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지요.


제가 어릴 적부터 20대까지 우리나라는 툭하면 국가비상사태 선포, 비상계엄 선포,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수령, 긴급조치 등이 수시로 발효되는 무시무시한 공포의 시간이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시골에서 살고 있던 어린 제 삶에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중학교 때 사회 선생님이 하루아침에 누구에겐붙잡혀간 것은 제가 그 무렵에 느낀 가장 큰 시대적 비극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쉬쉬하는 사이에 행방이 묘연한 사회 선생님에 대한 소문조차 사라지고 말았지요. 그러나 저는 그때까지도 집과 학교 바깥의 세상은 모르고 살았으니까 크게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대학생이 되면서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대해 새롭게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고, 가슴이 뛰었지요. 그런데, 대통령이 피살되고 또다시 계엄령 선포라니, 이번엔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공포와 불안이 엄습했습니다.


1979년 10월 27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토요일에도 직장에서 근무하고 학교에 가는 날이었지요. 그리고, 통신망이나 연락 체계도 지금과는 달라 신문과 방송의 뉴스 외에는 저에게 학교에 가지 말라고 알려주는 어떤 소식도 없었습니다. 저는 학교에 다녔던 세월을 통틀어 처음 겪는 일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지요. 결국 저는 직접 학교에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부모님의 걱정을 뒤로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마침 버스정류장에서 친구를 만났습니다. 다른 대학에 다니던 그 친구는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기로 했지요. 그런데, 그 친구는 이 틈을 노려 북한에서 전쟁을 일으킬까 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6.25 전쟁 때처럼 학도병으로 끌려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제 친구가 걱정하는 것이었지요. 제 친구도 학교에 가서 상황을 알아봐야겠다고 나선 길이었어요.


그날은 버스도 제시간에 오지 않아 더 오래 기다렸던 것 같아요. 가을철이라서 들판에서 추수하느라고 바쁜 동네 어른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우리를 보고, 한 마디씩 하고 지나갔습니다.


"뉴스에서 대학생들은 학교 가지 말라더라."



제가 학교에 도착하니, 착검총을 멘 군인들이 굳게 닫힌 교문 안쪽에서 돌아가라고 소리쳤습니다. 저 말고도 몇몇 학생들이 교문 밖에서 학교 안을 살피고 있었지요. 교문 밖에서 웅성거리는 학생들이 많아지자 군인들이 나와서 빨리 집으로 가라고 윽박질렀습니다.


79학번인 저의 대학1학년은, 1979년 10월 26일로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지요. 그리고, 학교에서 시험을 대체할 리포트 주제를 알려주는 우편물을 집에 보내주는 것으로 2학기를 마쳤습니다. 당시 2년제 교육 대학에 다니던 저는 1학년을 그렇게 마치고, 이듬해 5월에는 5.18 광주 민주항쟁 사건으로 5월 16일에 2학년 1학기를 마친 비운의 79학번이었지요.


저는 해마다 10월 26일이 되면, 1979년 그때가 마치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 험악한 풍경 속에 서 있던 사람들의 모습과 소리, 분위기, 냄새까지 선명하게 떠오르지요. 그리고, 이제는 쓸데도 없는 긴장감에 가슴이 두근거릴 때도 있습니다. 아마 제가 갖고 있는 트라우마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전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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