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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우주 Aug 08. 2023

학교장 취임사

저는 교직에서 40년 넘게 근무하면서 수많은 교장 선생님들을 보았습니다. 제 교육 철학과 교직 사명에 대한 생각을 키우고 바르게 세울 수 있도록 영향을 준 훌륭한 분들이 많았지요. 교장으로서 좋은 사람, 좋은 선배,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의지가 가장 강할 때는 교장 연수를 받을 때와 교장으로 처음 발령받기 전후였을 것 같습니다. 마음은 이미 세상 어디에도 없는 교장이 되어 있지요.


저는 2014년 3월,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 있는 학교의 교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의 거실에서도 훤히 내려다 보이는 학교였지요. 그런데, 선배 교장 선생님들은 기피하는 학교였어요. 저도 그 학교에 발령받은 일이 반갑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학교구성원들의 갈등이 너무 심해서 '대책이 없는 학교'라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지요.


제가 그 학교의 교장으로 발령을 받자, 학교에 대한 온갖 소문이 제게 들려왔어요. 제가 그동안 알고 있던 것보다 심각한 이야기들이었지요. 몽땅 파묻어 버리고 싶었지요. 저는 제가 교장이 되었다고 기뻐하는 가족들 몰래 자다가 일어나서 학교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짓곤 했어요.



교육부에 가서 받아온 대통령 명의의 폼나는 임명장도 제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는 처음 교장이 되는 사람에게 대통령이 주는 임명장을 교육부장관이 대신 전해 주었지요. 교육을 백년대계(百年大計)라고 하여 중요시하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관행이에요.


또 교장이 되어 처음 학교에 간 날, 취임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 교장이 된 사람들은 취임식에서 발표할 취임사를 준비해서 가지요. 취임사에는 자신의 교육관, 학교 경영 철학, 학교 교육의 방향과 강조하는 것 등 학교장으로서의 리더십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저도 여러 선배 교장선생님들의 취임사와 그 학교의 교육과정 등을 참고하여 감동적인 취임사를 작성하느라 애썼지요. 그런데 쓰는 도중에 읽어보니, 어떤 취임사도 소문난 그 학교의 상황과 맞지 않아 공염불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저는 며칠 동안 고생하여 쓴 취임사를 덮어 버렸지요. 그리고, 시 한 편을 출력하여 봉투에 담았어요.






*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


만리 길 나서는 길 / 처자를 내맡기며 /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 "너만은 제발 / 살아다오" 할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 "저 하나 있으니"/ 하며 /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 그 한 얼굴 생각에 /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그리고, 저는 '제2대 000 교장 취임식' 플래카드를 내걸고 모인 교직원들을 향해 뼈아프게 일갈(一喝)하고, 시 낭송과 덧붙이는 말로 마무리했습니다. 그야말로 살벌하기 짝이 없고,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취임사였지요.


"어제는 제가 잘 아는 교장 선생님이 전화해서 저에게 탱크를 몰고 출근하라고 했습니다. 이 학교 교장으로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는 준비하고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학교 밖에서는 우리 학교를 탱크로 진압해야 할 전쟁터로 말하고 있다는 것,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탱크를 몰고 오는 대신 새로 산 구두를 신고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낭송한 시의 그 사람, 제가 여러분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아가리라고 단단히 각오하고 왔습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기필코 해낼 것입니다."



[전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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