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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우주 Aug 11. 2023

1등부터 8등까지 성적순입니다

여고동창 7인의 회갑여행 -제1화-

저는 예순세 살에 백수(白手)가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백(白) 자가 '아무것도 없다'라는 뜻과 일이 없으니 '손에 쥔(가진) 게 없다'라는 뜻이지요. 그런 이유에서, 백수의 어원(語源)은 '일을 안 해서 손(手)이 하얗기(白)'  때문에 백수라고 한다는 것이 그럴듯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백수는 만 19세 이상의 성인이면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즉 백수는 '근로 능력이 있지만, 일정한 수입이 없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어쨌든 제가 정년퇴직을 하면서 우리들은 언제든지 완전체로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완전체의 이름을 얼마 전에 '백수 장미'라고 바꾸었지요. 원래 우리의 이름은 '필장미'였습니다. 처음 시작이 여덟 명이었으니 '팔(8)장미'라고 해야 하지만, '팔'의 발음과 '팔다'의 의미도 있어서 좋지 않다고 '필'이라고 했지요. 우리는 '필'에다 '피다'의 미래형 '필'과 영어 'Feel(느끼다, 느낌)'의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줄곧 스스로 '필장미'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2년 전에 영주가 우리 곁을 떠난 뒤로 '필(팔)'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칠 장미'라고 하자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우리는 먼저 가버린 영주의 빈자리를 이야기를 할 수 있었지요. 영주가 떠난 충격이 그만큼 컸던 거예요.


우리는 영주의 빈자리를 아파하며, '백수'까지 누리고 살자는 의미를 하나 덧붙여 이름을 바꾸었어요. 여기서 백수(白壽)란, 나이 99세를 일컫는 말이에요. '백(白)'은 '일백 백(百)'에서 '한 일(一)'을 뺀 것으로, 100-1=99가 되기 때문에 백수(白壽)는 100세에서 한 살이 모자라는 99세가 되지요.


'백수'에 또 하나 의미를 붙이자면, '백수'는 백수(百首)로 100송이를 뜻한다며 맞고 틀리고 상관하지 않고 우리끼리 그렇게 정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건강하게 장수를 꿈꾸는 활짝 핀 백 송이의 장미'라 뜻을 가진 '백수 장미'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백수 장미는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우리 백수 장미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여고 동창생들입니다. 우리는 옛날 옛적 장미를 교화(校花)로 삼은 여자 고등학교에서 만났지요. 그것도 1학년 첫 시험에서 우리 반 1등부터 8등까지 차지한 영재들이었어요. 당시는 성적순으로 자리를 배치하고 좋은 일에서 순서를 정할 때도 당연히 성적순이었지요.


그리고 우리들은 그것들을 마땅히 누리며 즐겼습니다. 요즘 같으면 인권 침해니, 인격 모독이니, 자존감 파괴니 하면서 민원이 쇄도하겠지만, 그때는 괜찮았어요. 유신 정권 체제에서는 더한 일도 많아서 성적순으로 자리를 배치하여 성과를 올리는 정도는 오히려 칭송받을 일이었지요.


우리 반 담임은 서울대학교 가정 대학 가정관리학과를 나온 수재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가정 관리는 뒷전이었지요. 우리 학교 선배로서 후배들의 성적 관리에 열정을 쏟느라 오래전부터 노처녀 딱지가 붙은 선생님이었어요. 사실 우리들의 시작은 이 노처녀 선생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 9등 이하의 학생은 신경 쓰지 않고 막무가내식 성적 관리를 한 덕분에 우리가 '필 장미'로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그 담임 선생님이 1학년 첫 시험에서 1등부터 8등까지 차지한 우리들을 교실 맨 앞줄에 전격적으로 자리 배치를 하면서 우리들의 역사는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때 우리 반 아이들은 63명이었고, 우리들은 맨 앞자리에 왼쪽부터 7등, 5등, 3등, 1등, 2등, 4등, 6등, 8등이 성적순으로 앉았습니다. 즉, 맨 앞자리 가운데에 1등과 2등이 앉았고, 그 옆으로 나머지 8등까지 앉았어요. 이후 성적은 뒤죽박죽 되었지요. 하지만, 우리들끼리는 졸업할 때까지 맨 앞줄의 영재 타이틀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우리들은 제가 퇴직한 것을 축하하고, 백수 장미의 재건을 기념하는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여행 경로는 대략 인천에서 출발하여 서해안을 따라 목포에 이르면 남해안으로 꺾어서 가다가, 부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강원도 고성까지 가는 것으로 말했지요. 우리들이 지도를 보면서 우리나라 해안선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어가며 '한 달 정도면 되지 않을까?' 하고 말한 것이 그만 여행 일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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