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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우주 Aug 14. 2023

그 집 며느리는 로또를 맞혔네

여고동창 7인의 회갑여행 -제3화-

제 계획대로라면 오늘은 인천 연안에 있는 가까운 섬에 다녀오려고 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8시 30분에 출발하는 배를 타면 자월도, 승봉도, 소이작도, 대이작도 중 한 섬을 다녀올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제 친구들이 어제 먼 곳에서 온 데다가 한밤중까지 이야기하느라 늦게 잠든 탓에 아침에 일어나 보니 8시가 넘어 버렸거든요.  


우리는 호텔 조식을 먹는 대신 바닷가로 걸어가서 커피를 마시고, 브런치를 먹기로 했습니다. 바다를 향해서 걸어가다가 커피 볶는 냄새가 풍겨 나오는 카페로 들어갔지요. 이른 시간에 일곱 명이나 되는 우리 일행이 들어가자 커피 볶는 데 정신을 팔고 있던 주인이 깜짝 놀라 다가왔습니다. 


"저기 호텔에서 일어나자마자 나왔는데, 우리한테 줄 수 있는 거 다 주세요." 


은옥이가 카페 주인에게 밑도 끝도 없는 주문을 하고 창가 테이블에 털썩 앉았습니다. 우리들도 우르르 따라가 앉았습니다. 



은옥이는 서울에서 오랫동안 식당을 운영하다가 이태전에 아들 부부에게 물려주고 용인으로 이사했습니다. 은옥이 부부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텃밭이 있는 전원주택에서 살고 있지요. 중소기업 규모의 큰 식당을 운영해서 그런지 은옥이는 상황 판단이 빠르고,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카페 주방에서는 아까 커피 볶던 사람이 혼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척은 있는데, 뭐가 나올 기미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에고, 손님 일곱 명에 절절매면 어떻게 돈을 벌어! 쯔쯔쯔."


은옥이가 한 소리 하더니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주인과 함께 이내 커피와 빵을 가지고 왔습니다. 빈 쟁반을 챙겨 돌아서는 주인에게 샐러드를 만들 만한 재료가 있으면 되는 대로 한 접시 만들라고 명령하는 은옥이를 보며 우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지요.



"넌 남의 가게에서도 일이 척척 되는구나. 최은옥 최고임! 인정!"


베테랑 식당주 은옥이의 손길로 차려진 커피와 빵은 당연히 맛있었지요. 카페 주인은 샐러드를 예쁘게 담아서 가져다주었습니다. 샐러드도 신선한 게 맛이 아주 좋았습니다. 은옥이는 이런 상황에서는 직업병이 도진다고 말하며 아들 부부에게 물려준 식당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한 달 매출이 10억에 이르는 은옥이네 곰탕집은 시할머니가 시작한 식당입니다. 직원만 해도 100명이 넘으니  중소기업이지요. 처음부터 큰 식당은 아니었어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살았던 이화장이 있는 종로구 이화동 낙산 기슭에 있는 작은 집에서 시작되었지요. 


최초 식당을 연 시할머니는 우리들이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으로 기억하는 1919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이름으로는 세련된 박은환 시할머니는 재령평야에 땅을 많이 가진 지주의 딸이었지요. 재령 명신여학교를 졸업한 재원으로 소학교 교사로 있다가 시할아버지와 결혼했어요. 그리고 경성제국대학에 다니는 남편을 따라 서울로 와 학교 근처에 이화동에서 살게 된 것이지요. 


박은환 할머니는 그때부터 이화동에서 살다가 은옥이 시아버지와 아래로 아들 둘을 더 낳아 기르는 사이 해방이 되었지요.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대학교수였던 시할아버지가 행방불명되었어요. 그 바람에 시할머니와 시아버지 형제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화동에서 전쟁의 시간을 견디었습니다. 



결국 시할아버지는 집에 오지 못한 채 돌아가시고, 휴전선 이북에 있는 시가와 친정과도 연락이 끊겨 시할머니가 의지할 데라고는 세 아들밖에 없었지요. 시할머니는 고등학생, 중학생이던  세 아들을 먹이고 가르치기 위해서 뭐든 해야 했어요. 부잣집 딸로 태어나 학자의 아내로 곱게 살아온 시할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겠지요. 


시할머니는 궁리 끝에 옷과 세간살이를 팔아 살고 있던 집을 식당으로 바꾼 다음, 마장동 도축장에 직접 가서 식재료를 사다가 끓인 곰탕을 팔기 시작했지요. 시할머니가 곰탕을 팔아서 번 돈으로 시아버지 삼 형제는 모두 대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지요. 


은옥이는 일본 유학 중에 남편과 결혼했어요. 이때, 함께 공부하던 일본 사람이 200년 가업을 지킨다며 고향의 우동가게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은옥이는 당시 시할머니와 시어머니가 함께 운영하고 있던 곰탕집도 200년 가업의 일본 우동가게 못지않은 서사를 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지요. 이런 철학을 가진 은옥이가 시어머니와 함께 30년 동안 식당을 운영하면서 곰탕집은 르네상스를 맞이한 셈이었지요. 식당은 놀라울 만큼 성장했습니다. 


이제는 은옥이 아들 부부가 식당을 이어받아 젊은이들도 선호하는 음식점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며느리가 호텔관광외식경영학부를 졸업한 재원으로 은옥이가 거는 기대가 큽니다. 우리가 백수를 누리는 동안 곰탕집 100주년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요. 


"최 회장님, 그 식당 부지도 넓던데, 서울 강남 한복판 땅값만 해도 얼마야?"

"은옥이 며느리는 좋겠다. 대체 로또를 몇 개나 맞힌 거야?"

"사모님들아, 그런 소리 마시라. 내 손을 보고 나서 말해."


은옥이는 데고 베인 상처 투성이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은옥이의 거친 손을 감싸 쥐었습니다.


"맞아. 이 세상에 거저 얻게 되는 것은 없더라."

"은옥아, 고생 많이 했다."



저는 친구들에게 원래의 일정 계획을 그제야 알렸습니다. 우리는 브런치를 먹고 나서 영종도에 가기로 했지요. 그리고 을왕리 해변에서 오래오래 놀다가 바지락죽과 조개구이를 먹고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전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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