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백수 장미들의 이번 여행이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쉰 살을 넘기면서 '회갑 여행'을 계획했어요. 마추픽추를 가기로 했지요. 그리고 60살이 되자, 그동안 자동이체로 쌓인 적립금이 마추픽추를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만큼 되었고요.
우리들 백수 장미는 2020년과 2021년에 환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환갑을 맞이하고 보니 COVID-19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패닉 상태였지요. 더군다나 일곱 명 멤버 중 고혈압, 갑상선, 무릎 관절 질환을 앓고 있는 친구들과 대사증후군으로 건강 관리에 예민한 친구가 있었어요. 또 네 명이 아직 일을 하고 있었고요.
즉 우리들 대부분은 장기간 국외 여행이 불가능한 사람들이었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산지대인 마추픽추를 아무 탈 없이 여행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한 사람이 우리들 중에는 없다는 것이었지요.
결국은 어느 날 우리가 모여서 우리나라 지도를 펼쳐놓고, 심드렁하게 손가락으로 해안선을 따라 그은 것이 이번 여행의 시작이 된 것이에요.
다만 이번 여행을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는 대신 마음 내키는 대로, 몸이 따르는 대로 느긋하게 그리고 쉬엄쉬엄 실행하는 것을 전제로 계획했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한 달 남짓 여행하는 중에 분명히 여러 가지 변수가 생길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지요. 하지만, 국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웬만하면 다 해결할 수 있다는 대한민국 아줌마의 깡에서 나오는 자신감도 있었고요.
우리는 여행 구간별, 날짜별로 나누어 담당자를 정해서 기본적인 일정을 계획했습니다. 숙소와 방문 장소, 만날 사람, 식당 등을 예약하거나 미리 정보를 챙겨두는 일이었지요. 특별한 연고가 있거나 잘 아는 지역을 우선으로 담당자를 정했지요.
우리들 60대 여행자 일곱 명은 아침에 일어나면, 각자 약을 챙겨 먹는 것으로 일상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삼킨 알약의 효능을 믿고 힘차게 길을 나서지요. 여행 3일 차는 인천에서 안면도까지 이동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천에서 평택시흥고속도로를 찾아 달리다가 서평택에서 서해안고속도로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안면도로 가는 길에 서산시 해미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IC 가까운 곳에서 마리아의 동생이 농장과 음식점을 운영 중이라고 해서 들렀다가 가기로 한 것이지요. 마리아의 막냇동생인 안나는 우리도 잘 아는 사이여서 모두들 흔쾌히 동의하고 여행 일정에 넣었지요.
오후 1시쯤 도착한 안나네 농장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흔한 농장이 아니었어요. 저수지와 하천을 끼고 있어서 풍광이 좋은 데다가 기업형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규모였지요. 안나는 우리들에게 연잎밥과 토종닭 백숙, 블루베리를 넣은 요구르트를 한상 푸짐하게 내주었지요.
"안나 성공했구나! 이 땅값만 해도 얼마야?"
"아이고, 절반은 은행 거예요. 다 빚으로 산 거라 언제 우리 게 될지 몰라요."
저는 심술쟁이에 욕심 많던 단발머리 꼬맹이 안나와 농장 안주인 안나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마리아 집이 학교 근처여서 우리들이 아지트로 삼고 자주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리아 집에서 가끔 밥을 먹기도 했지요. 메뉴는 항상 비빔밥이었어요. 비빔밥이라고 해서 거창한 게 아니고, 뜨거운 쌀밥에 마가린과 간장, 고추장을 넣고 비벼 먹는 것이었어요. 그토록 고소하고 맛난 마가린의 풍미를 그 후로는 경험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들이 마리아 집에 가면 초등학생이었던 안나가 빼꼼히 내다보고는 부엌으로 쪼르르 가서 마가린을 감추어 버리는 거예요.
"안나야, 마가린 안 찾아주면 참기름에 비벼 먹고 엄마한테 이를 거다. 네가 마가린을 숨겨서 비싼 참기름을 많이 먹었다고."
"안나야, 너 이 핀 예쁘다고 했지. 가질래?"
"안나야, 다음에 올 때 언니가 쥐포 구이 사다 줄게."
"안나야, 너 초코파이 좋아하지? 크리스마스 선물로 한 상자 사 줄게."
그러면 볼을 터질 듯이 부풀린 안나가 벽돌만 한 마가린을 슬그머니 가져와서 마룻바닥에 툭 던져놓고 도망쳤지요. 그 볼멘 심술쟁이 안나가 챙 넓은 밀짚모자에 장화를 신고 걸출한 농장 안주인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으니 지나간 세월이 실감 났습니다. 그때는 이런 미래를 상상도 못했어요. 우리는 욕심쟁이 안나가 마리아네 쌀가게를 물려받아 '김제 쌀집' 주인이 될 줄 알았지요.
안나네 농장에서 나온 우리는 해미읍성으로 갔습니다. 입추가 지났지만 한낮의 더위 때문에 성을 다 구경하기는 힘들어서 그늘을 찾아 걸었지요. 그리고 곧 나와서 해미읍성 앞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나니 더위가 좀 가시는 듯했어요. 요즘은 어디를 가도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어서 좋습니다. 우리는 시원한 커피를 마시고 한결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10일이라 해미 장날이라고 안나가 알려준 대로 장터 구경에 나섰습니다. 정임이와 경자는 카페에 남고, 다섯이서 양산을 챙겨 나갔지요. 장터는 카페 옆길을 따라 길 양쪽으로 열려 있었어요.
근방에서 생산한 호박, 오이, 가지, 옥수수, 풋고추 같은 채소가 싱싱하고 일찍 심은 서산고구마도 나와 있었지요. 바다가 가까워서 수산물도 신선한게 많았어요. 우리는 사과와 옥수수를 사서 나누어 먹고, 간월도 낙조 시간에 맞추어 출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