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번 여행을 인천에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백수 장미 클럽 멤버 일곱 명이 각각 서울, 안양, 용인, 전주, 청주, 울산, 광양에서 출발하여 인천에 모였습니다. 백수 장미가 참으로 오랜만에 완전체로 모였지요.
우리는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 주로 만났어요. 줌(ZOOM)을 활용하여 화상 채팅도 했지요. 대한민국의 60대 아줌마들 치고는 뒤떨어지지 않는 소통 방식이라고 자화자찬하면서 거의 날마다 떠들썩하게 회의를 했습니다.
자동차는 SUV나 RV가 편할 것 같다고 의견을 모아 은옥이와 제가 각각 차를 가져와 운전을 하기로 했지요. 그리고 최소한의 짐만 간편하게 꾸릴 것을 서로 당부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10전에 갔던 유럽 여행에서 감당할 수 없는 짐 때문에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특히 경자와 은숙이를 향해 신신당부하고 여러 번 다짐받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행 첫날과 이튿날 숙소를 인천 송도에 있는 호텔에 예약했습니다.
저녁식사는 메뉴를 고민하지 않고 생선회를 선택했습니다. 당연히 술도 마셨지요. 그리고 모두 술에 취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저와 마리아, 정임이가 함께 쓰는 방에서 다시 모였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먼저 가버린 영주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영주 시어머니는 왜 영주를 그렇게 싫어했는지 물었어요. 친구들이 영주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이 사람 저 사람이 한 마디씩 거들어서 이야기를 맞추었지요.
영주의 남편은 위로 딸만 넷을 낳은 시어머니가 백일기도와 불공을 드린 끝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귀남'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지요. 게다가 귀남이 아버지가 지역 유지였고, 잘 사는 집이어서 귀남이는 어려서부터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랐어요. 귀남이는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곧바로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하였습니다. 영주는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하고 이일 저일 하던 중에 귀남이를 만났지요.
귀남이는 강원도 태백에 발령을 받아 전주에서 일하고 있던 영주를 자주 만날 수가 없게 되었어요. 어느 날 하루빨리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귀남이가 영주를 만나자마자 자기 집에 가자고 했지요. 영주는 귀남이의 제안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달리 날을 정하기도 번거로울 것 같아서 그러자고 했지요.
그런데, 귀남이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영주가 따라나선 것이 모든 사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영주와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정확하게 짚어보면, 그날 영주가 입고 간 옷과 신발이 시어머니의 눈에 거슬렸던 것 같아요. 영주는 목과 팔이 많이 파인 민소매 블라우스를 입고, 빨간색 통굽 슬리퍼를 신었거든요. 웬만한 멋쟁이가 아니면 차려입기 힘든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때는 그런 차림이 흔치 않았을뿐더러, 그 자리에서는 흠이 되고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 될 수도 있었지요.
영주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옷을 입는 감각이 남달랐어요. 심지어 일자형이 규칙인 교복 블라우스 옆선을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게 고쳐서 허리를 잘록하게 강조하여 입고 다녔지요. 체육복만 해도 우리들은 양장점에서 저지 원단으로 펑퍼짐하게 만들어주는 대로 입었지요. 그런데 영주는 달랐어요. 체육복을 원단부터 각을 세울 수 있는 천으로 해서 나팔바지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해서 학교 밖에서도 사복처럼 멋지게 입고 다녔지요.
그날 귀남이 어머니는 영주를 처음 보자마자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영주와 귀남이를 매우 곤란하게 했지요. 귀남이 어머니는 영주가 대학을 안 다닌 것, 귀남이의 셋째 누나와 나이가 같은 연상녀인 것, 귀남이 넷째 누나가 아직 미혼인 것을 이유로 들어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지요.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지요. 결국 영주와 귀남이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어요.
하지만, 귀남이 어머니는 결혼식을 준비하면서도 사사건건 영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감정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그 무렵에 유행하기 시작한 야외 웨딩 촬영을 영주가 고집하자, '네가 배우라도 되는 줄 아냐'라고 하며 핀잔을 주었지요. 또 결혼 예물을 시어머니가 골라준 대로 공손하게 받아도 예쁘지 않을 영주가 잡지에 있는 반지와 목걸이 사진을 오려다 주면서 주문한 것을 두고도 까탈스럽다고 말했어요. 거기에다 영주 딴에는 알뜰살뜰 모으던 적금통장까지 깨서 준비했지만 넉넉하지 못한 혼수가 시어머니 눈에 찰 리가 없었지요. 영주네가가난하고 형제가 많은 것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귀남이 어머니는 영주에게 몇 번이나 말했어요.
영주 성미에 몇 번이나 혼사를 엎겠다고 했지요. 그러나, 잘 살게 되면 그런 일은 세월이 흐르면서 잊게 될 것이라는 귀남이와 주변 사람들의 말을 믿고 영주는 결혼하기로 한 것이지요.
정작 큰일은 결혼 후에 일어났습니다. 영주 남편은 가끔 탄광 안 갱도에 들어가야 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폐소공포증이 있었어요. 심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끔 힘들다고 영주에게 하소연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영주의 남편이 갱도에서 쓰러져 들것에 실려 나온 일이 있었어요. 영주는 뒤도 안 돌아보고 태백을 떠나 전주로 돌아왔지요.
그 후 영주와 남편은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시댁의 재산만 축냈지요. 영주네가 하는 사업은 번번이 망하고 말았거든요. 결국 영주는 두 아이들을 데리고 시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6년 만에 영주도 유방암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영주가 그나마 마음 편히 살았던 게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2~3년이었던 것 같아요. 곧 유방암을 발견하고 2~3년은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느라 고생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영주의 부고를 받고 장례식장에 갔을 때, 서른 살 영주가 활짝 웃는 사진이 영정으로 놓여 있어 깜짝 놀랐던 일이지요. 그때 영주는 환갑을 넘긴 나이였거든요. 왜 서른 살 적 사진을 영정으로 올렸는지 궁금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모여서 이야기하다 보니, 저만 궁금했던 게 아니고 모두들 그 일을 궁금해하고 있었어요.
"영주 남편 전화번호 아는 사람 있어?"
"갑자기 왜?"
"그때 영주 영정 사진도 궁금하고, 영주가 시어머니랑 화해했는지 물어보려고."
"참아라. 술 취해서 한밤중에 헛소리한다고 할라."
"맞다. 그리고 시어머니랑 화해는 무슨 개뿔, 시어머니랑은 원래 그렇게 살다가 가는 거야. 우리 세대는 다 그래."
우리들은 영주 생각을 꾸역꾸역 삼키며, 5성급 호텔방을 두 개나 비워 두고 일곱 명이 한방에서 아무렇게나 뒹굴어 잤습니다. 우리 백수 장미의 여행은 그렇게 첫날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밤늦도록 죽은 영주를 그리워하다가 잠이 들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