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우주 Aug 24. 2023

군산, 그곳에 내 친구가 살고 있었어

여고동창 7인의 회갑여행 -제8화-

우리는 비인 해변을 떠나 군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에서 전라북도 군산시로 연결되는 다리를 건너가기로 했지요. 그런데 다리 이름이 '동백대교'라고 내비게이션에 떴습니다. 우리들에게 두 도시에 대한 정보가 많지는 않았지만, '동백대교'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접점을 찾을 수가 없어서 궁금했지요. 제 차에 타고 있던 친구들이 고개를 갸우뚱할 때 정임이가 스마트폰으로 검색했습니다.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원수리와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동을 잇는 3.19km의 교량이다. 금강하굿둑보다 서쪽에서 장항 읍내와 군산 시내를 직통으로 연결해 주고 있다. 처음에는 군장대교로 불리다가, 이름을 공모하여 군산시의 시화(市花)와 서천군의 군화(郡花)인 '동백'을 따서 동백대교로 확정했다. 동백대교하면 군산, 서천보다는 여수시나 부산광역시를 떠올린다는 의견도 있다. 부산광역시에는 조용필의 노래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알려진 동백섬이 있고, 여수시는 오동도 동백꽃 축제로 인지도를 쌓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군대교"나 "사랑대교"로 바뀌었으면 한다는 의견도 있다. -위키백과-


우리는 군산의 구시가지에 있는 호텔을 예약했습니다. 군산에 도착하여 바로 호텔로 가서 한 시간 남짓 쉬었습니다. 그리고 호텔에서 가까운 곳에 유명한 중국음식점이 있다고 해서 저녁식사를 그곳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는 1학년 때 우리 반이었던 김순영이 나오기로 했습니다. 순영이는 3학년 때도 저와 같은 반이었어요. 순영이는 3년 동안 1번이었지요. 그때는 키 순서대로 번호를 정했는데, 새 학년이 되면 반별로 한 줄로 서서 제일 키가 작은 아이가 1번, 키가 제일 큰 아이가 끝번으로 정하는 것이었지요. 지금은 남녀, 키 상관없이 이름의 가나다 순으로 번호를 정하고 있지요. 옛날처럼 남자부터 1번을 주면 양성 평등에 위배되는데, 물론 여자부터 1번을 주어도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키 순서로 번호를 정하면 학생 인권 침해가 되는 세상입니다.


1번이었던 영이는 얼마나 야무지던지 못하는 게 없었어요. 체육 시간에는 작은 몸이 훨훨 날았고, 가정 시간에는 뜨개질, 자수, 바느질을 다 잘했지요. 겨울이 되면 하얀 털실로 마스크를 떠서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팔기도 했어요. 미술 시간에 목판화 배울 때는 우리 반에서 가장 정교하게 팠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지요. 특히 음악을 잘했는데, 합창 지휘를 해서 3년 동안 교내 합창 대회를 휩쓸었습니다.


하지만 영이도 못하는 게 있었습니다. 요즘 흔히 말하는 수포자였지요. 이는 수학 시간에 거의 엎드려 잤던 것 같아요. 그런 순영이에게 3학년이 되자 수학 선생님이 칠판 당번을 시켰어요.


"김순영, 수학은 포기하더라도 수학 선생님한테는 관심을 가져라. 그런 의미에서 너를 칠판 당번으로 임명한다."



수학선생님은 칠판을 3등분 하여 왼쪽 칸부터 오른쪽으로 차례대로 쓰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사실 칠판 당번이라는 게 별거 아니었어요. 수학 선생님이 첫 번째 칸과 두 번째 칸을 다 쓰고 세 번째 칸을 쓰기 시작하면, 순영이가 의자를 놓고 올라서서 칠판의 첫 번째 칸을 지우는 방식으로 하는 일이었지요.


그런데 세 번째 칸 칠판에 문제를 풀어가는 수학 선생님과 의자에 올라서서 정성껏 칠판을 지우는 순영이가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고 느꼈습니다. 칠판을 다 지우면 순영이는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엎드려 잤어요. 그리고 어느 틈엔가 일어나 또 칠판을 지웠지요. 아무튼 순영이는 3학년 내내 칠판 당번을 별 불만도 없이, 그렇다고 즐거워하지도 않고 무덤덤하게 끝까지 해냈습니다.




순영이는 우리보다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빈해원>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걸어서 호텔까지 갔습니다. 순영이도 함께 갔지요. 우리가 호텔에 도착했을 때, 군산에 오는 여행객들이 반드시 줄 서서 사 먹는다는 이성당 단팥빵이 배달되어 있었습니다. 순영이가 보냈다고 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밥 한 끼 해주면 좋겠는데, 집이 좁고 누추해서 친구들을 초대할 수가 없어. 대신 내일 저녁에 우리 딸 연주회에 초대할 게."


순영이 딸은 바이올린을 전공했다고 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제법 유명세를 타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자랑했습니다. 순영이가 가져온 연주회 팸플릿을 보니 순영이를 쏙 빼닮아 예쁜 딸이 바이올린을 들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멋진 포즈로 찍은 사진이 눈에 띄었습니다.



"순영이 딸 잘 키웠네."

"공부시키느라고 고생 많이 했겠다."

"딸이 엄마 꿈을 이루어 주었구나."

"엄마 닮아서 예술적 재주가 있구나."


우리는 모두들 한 마디씩 칭찬하느라 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순영이에게 군산에서 사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순영이네는 시아버지와 함께 조선소를 운영하는 사업을 했다고 합니다. 군산에서는 알아주는 조선소로 일감이 기본적으로 2~3년 치는 쌓여 있는 탄탄한 회사여서 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고 합니다. 제 기억에 순영이는 고등학교 졸업 30주년 행사 때도 가장 많은 돈을 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2008년 금융위기 때부터 사업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는데, 2014년에는 유가 급락으로 조선업 시장이 완전히 침체되었다고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2016년에는 국내 대형 조선소들이 유례없는 글로벌 발주 감소 사태를 맞았으며, 그 여파가 작은 조선소에까지 미쳤다고 합니다.


특히 조선업에는 많은 자본과 기술력도 투입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전형적인 노동 집약적 산업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숙련공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사업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불황기 동안 조선업 숙련공들이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나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수주 감소, 자금난, 숙련공 부족 등으로 조선소 운영 자체가 힘들어져 2020년에 폐업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폐업이라는 게 말처럼 단순하지 않아 살던 집까지 팔아서 정리했는데, 아직도 법원이나 검찰청, 고용노동청, 전기와 가스 회사, 사인(私人) 등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고지서를 받는다고 순영이가 고통을 털어놓았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에는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할 수 있어 큰 아들은 작곡을 전공하여 독일에서 살고 있고, 둘째 딸이 내일 저녁 바이올린 연주회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부자 망해도 삼 년 간다는데, 우리는 내가 수산물 경매 기록보조로 일해서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산다."


순영이의 익살은 아직도 그대로 살아 있는 듯 엄살을 떨며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우리는 순영이로부터 알지도 못했던 최근 우리나라 조선업의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순영이가 역경을 잘 견디고 하루빨리 벗어나기를 바라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전우주]

작가의 이전글 수업하는 교장 선생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