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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다 12

25년 5월 1일

by 해마

비가 온다. 나는 김치전을 좋아한다. 엄마가 전을 부칠 때 기웃거리면, 반죽에 정체 모를(김치전은 김치인 것이 뻔하지만) 내용물들이 버무려져 있는 것이 괜히 구역질 날 때가 있었다. 막상 부쳐두면 좋아라 하며 먹는다. 지금 내 속에는 오만가지 내용물들이 역겹게 버무려져 있다. 도피에 가까운 변화를 겪었다. 겉보기엔 다행이고 속은 정체 모를 전의 반죽 같다. 언제 다 부쳐서 형태를 띌 수 있을까. 조금씩이라도 지워내고자 하지만 나에 대한 혐오감은 계속 차오른다.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들만 조각으로 남아있다. 조각의 가장 거친면으로 나를 사포질 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꿈을 꿨다. 약을 먹고는 좀체 꿈을 안 꿨는데 어제는 약을 깜빡하는 바람에 꿈을 꾸었나 보다. 평소 딱히 호감은 아니던 연예인이 나왔다. 그 연예인의 팝업 행사장이었다. 인기가 엄청나게 많은 연예인인데도 이상하게 사람이 없었다. 그 연예인이 들어와 자기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애장품으로 내놓았다. 나는 선글라스를 좋아하지도, 그 연예인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 선글라스를 냉큼 집었다. 되팔면 돈이 꽤 될 것 같은 마음에서다. 옆에 있는 책들을 구경하는데 내 눈길을 잡는 책이 두 권 있었다. 아주 익숙하고 우울한 제목이었던 것만 기억난다. 다른 책들을 구경하다가 미친 듯이. 정말 미친 듯이 삶이 지루하고 지겨워서 구경하던 책을 매대에 던지듯 놓았다. 삶이 너무 지겨우면 이렇게 책을 던져놓듯, 그렇게 삶을 놓을 수도 있겠구나. 자살 정말 별거 아니구나. 하는 독백들이 스쳐갔다. 꿈인 줄 몰랐던 그 꿈 안에서조차 ‘나 지금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팝업 행사장을 나오며 삶대신 연예인의 선글라스를 제자리에 놓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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