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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다 11

25년 4월 12일

by 해마

그날까지도 보고 싶은 마음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딱 50:50에서 미친 듯이 고지전을 벌이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편지까지 준비해 두었지만 내 삶이 ‘부끄러웠‘고, 뵙게 되면 ‘무너질까 봐’ 철수를 만나도 이상하지 않고 만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에 갤러리를 방문했다. 갤러리엔 나 혼자였기에, 여유롭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어떤 작품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봐서 몸이 뚫리는 것 같기도 했으며 벌거벗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 어떤 작품은 제목과는 다르게 너무너무 힘겨워보여 보기조차 힘들었으며 어떤 작품은 그 속의 형체가 너무나 부러워서 입을 벌리고 보았다. 갤러리에서 철수를 만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갤러리를 나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갤러리 앞에서 조금 꼼지락 거리는 중이었는데, 저 멀리 철수가 보이는 게 아닌가. 고민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가 인사를 건넸다. 반가웠지만 이유 모를 눈물이 왈칵 나와 한참 곤란했다.


철수는 작가로 참여한 따끈따끈한 책을 나에게 선물해 주셨다. 맨 앞장에 싸인과 함께 무언가를 적어주셨는데, 뭐라고 적어주셨을지 너무 궁금했다. 집에 가는 길에 열어보면 또 청승맞게 울 것 같아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다급했다. 집에 오자마자 책부터 펼쳐보니 “참 다정한 해마에게.”라고 적혀있었다. 책을 붙들고 또 한참을 울었다. 철수는 나를 다정하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말라비틀어진 피폐한 나에게서 어떤 온도를 느끼셨던 걸까. 철수의 문장들은 일상적인 것 같은데 항상 나를 울린다.


에세이 중 철수가 쓰신 부분을 먼저 읽고 이른 저녁잠에 들었다. 밤에 잠깐 깨고 일어나니 새벽 다섯 시 즈음이었다. 어제 철수와의 만남이 굉장히 오래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제 정말 지느러미가 없어 해류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해마라는 것을 증명하듯, 눈을 떴을 때부터 눈물이 바다를 이룬다. 오늘은 정말 에너지가 없었지만 약속된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기차역으로 향했다.


철수와의 대화는 도돌이표처럼.

나에 대한 걱정과, 걱정하지 말아 달라는 나의 만류가 뒤엉켜 섞인다. 무엇보다 내 팔을 걱정하는 철수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건 그냥 몸일 뿐인데. 육체일 뿐인데. 딴 게 더 아픈데.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이건 몸일 뿐인데.. 몸일 뿐이잖아” 만 반복했다.


뭐가 나를 우울하게 하냐는 철수의 물음에, 어떻게 말해야 철수가 걱정하지 않을까, 상처받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무리 말을 골라도 딱히 적절한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이번 주는 또 어떻게 한 주를 버티지. 그런 거지.”

철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 말에도 가슴에 쿵 하는데, 내 우울의 이유를 들을 수 있겠어?”

철수는 안 되겠다며, 오늘 할당량은 끝난 것 같다고 했다.


정말로, 표류하는 해마가 되어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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