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5월 9일
가면이 점점 두꺼워진다.
퇴근과 동시에 가면을 벗어던지고 무표정으로 걷는다. 착 가라앉은 내 모습은 회사에서의 모습과 격차가 커서 생경하다. 기분은 수시로 롤러코스터를 탄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줄어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나면 책을 몇 자 읽을 시간도 부족하다. 책으로 온 감정을 쏟아내었었는데 또다시 감정들이 켜켜이 쌓이는 게 느껴진다. 대문자 T인 나에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주 진귀한 일인데, 점점 우는 것이 익숙해져 간다.
책장이 부족해서 책을 좀 되팔려고 바코드를 찍어보니 전부 5000원 내외였다. 살 땐 비쌌던 책들인데, 책에 수백만 원을 쓰고 이것밖에 못 돌려받는다니. 가치가 뚝뚝 떨어진 나 같아서 서러웠다. 책은 되팔기라도 되지만 삶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이 인생은 되팔기도 글렀다. 무엇이든 정리를 하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나를 달래 봐도, 슬픔이 참아지지 않아 엉엉 울었다. 울기만 했으면 다행이랴.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삶이 세세하게 적혀있을 거란 나의 기대와는 달리 묘사는 별로 없었다. 대신, 그가 말하는 정신분석학적인 내용들은 유용하고 대단했다. 그는 수용소에서도 도덕적이며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러지 못했을 나 자신에게 역겨움을 느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라고 쓰여있다.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그냥 누워 있으려고만 한다고. 나는 수용소에서도 불운한 수감자에 지나지 않음을 다시 체감한다. 나는 스스로 수용소에 들어가게 된 것인지, 대체 무엇이 나의 죄의식을 자극하며 “책임감”에 대한 격렬한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지에 대해 의문투성이일 뿐이다. 빅터 프랭클은 내가 삶의 의미를 질문할 것이 아니라 삶이 나에게 던지는 질문을 잘 생각해야 한다고 했으나 그의 집필 의도와는 정반대로 “왜 살아가야 하나”라는 질문만 머릿속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