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5월 16일
호우주의보가 내려질 만큼 빗물이 찰랑이는 날이었다. 그날은 눈물도 찰랑였고, 마음도 찰랑였다.
북토크장에 들어서서 조금 당황했다. 연령대가 높았고, 내 또래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렇게 밝고 서로 마주 앉는 강연장인줄도 몰랐다. 마치 초등학생이 된 듯 4개씩 모둠 지어있는 책상을 보며 내 모둠엔 아무도 앉지 않길 빌었다. J께 목례인 듯 아닌듯한 인사를 했다. 친분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도 않았으며 J님도 분명 그러리라는 믿음에서였다.
책을 읽으며 Y작가님과 L작가님의 글이 참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고 포스트잇도 많이 붙였는데, 실제로 뵈어도 그 두 분이 가장 내 눈길을 끌었다. 글은 역시 정체성인가 보다. Y작가님이 특히 눈길을 많이 끌었는데, 아마 자신을 가장 드러내지 않으셔서 인 것 같다. L님의 말씀에 눈물이 차오르기도 했다. 상처를 이겨낸 게 아니고 자연스럽게 흘려보낸 거라고 하셨다. 모두 힘든 때가 있다고 하셨다. ”단지, 글을 쓰지 않을 뿐“이라는 말이 깊게 박혔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애꿎은 내 커피를 노려보며 만지작거렸다. 연령대가 높은 북토크 참가인원들(나보다 더 오래 살아낸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이 어떻게 삶을 버텨냈는가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내밀한 지점을 글로 써내면서 마주하는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할 것 같은데, 작가님들은 어떤 용기로 글을 쓰셨는지 궁금했다. 북토크에 가기 전부터 그 궁금증을 가지고 기회가 되면 질문을 하려고 했는데, 콘테스트 시상을 하러 나오신 영화감독님이 하신 말에 혼자 단념했다. "작가님들은 내밀한 자신의 이야기들을 글로 펴낼 만큼 그것들을 이겨내셨고 그만큼 단단한 분들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한 문장에 '아 그렇구나.' 하는 마음과.. 함께 "포기", "단념" 등의 단어가 마음을 맴돌았다. 작가님들은 용기를 내서 집필을 하신 게 아니었다. 이미 상처들에 딱지가 앉아 집필을 하실 수 있었던 건가 보다. 그들처럼 되는 길이 너무 멀어 보였다.
강연장을 나오기 전 J와 짤막한 대화(아쉽기만 한..)를 나누고, Y작가님의 싸인을 책에 받았다. J님으로부터 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는 Y님은 "당신의 시작을 믿어요!"라고 써주셨다. 시작이라니.. 그 단어가 생경했다. 믿는다는 말은 감사했다. 나오는 길에 강연장의 핵인싸이신 L작가님의 싸인도 받았다. 문득, 거기에 계셨던 대단하고 유명한(나는 모르는) 시인님들, 작가님들, 대학총장님들, 영화감독님들, 어떤 그룹의 장님들 등등처럼 오래 살아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분들은 여유로워 보였으며 행복해 보였다. 강연장을 나오며 빗소리를 뚫고 나올 만큼 소리 내어 울었다. 걸으며 울고, 걷다 서서 울고, 소리 내 울고, 주저앉아 울고, 흐르는 눈물을 열심히 닦으며 울었다. 비가 와서 우산으로 얼굴을 가릴 수 있었고, 우는 소리를 가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이런 감정과 몰골로 지하철을 탈 자신도 없었으며 M이 너무 보고 싶었다.
사무치게 외로웠다.
공교롭게도 서울역 근처였기에 천안으로 가는 기차표를 냅다 예매했다. M을 만나서 또 한 번 눈물을 쏟아냈다. M은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위해 항상 먼저 움직인다. 그날은 M이 나를 보살피느라 내 곁을 이탈하는 그 잠깐도 떨어지기 싫었다. 그냥, 나라는 존재가 살아있음을 느끼도록. 내 모든 피부가 감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빈 공간 없이 몸을 포개있고 싶었다. 자꾸만 M의 손을 끌어당겨 안았다. 약을 하나도 가져오지 못해서 불안한 맘을 뒤로하고 M이 끓여준 라면과 맥주 한 캔으로 눈물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