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다음 단계

정신의학과 진료일지

by 해마

내 진료시간은 12시 50분이다. 아무 생각 없이 몇 주 갔었는데, 오늘 문득 이 병원 점심시간이 언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1-2시가 휴식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휴식시간을 빼서 나를 진료해주고 계셨던 건가보다. 오늘 가면 진료시간을 바꿔야겠다.


오늘은 선생님이랑 정말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근데 잘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선생님은 내가 한 행동들을 실수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냐고 물었다. 나는, 실수가 반복되면 나는 그런 사람인 거라고 했다.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기도 하지만 허를 찌르는 선생님의 질문에 답변이 턱턱 막히기도 한다.


무엇이 그렇게 책임감을 갖게 하냐고 물으셨을 때, 나는 벙어리가 됐고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시점이라고 하실 때는 눈물이 울컥 넘어오기도 했다.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내가 발을 내디뎌야 하기 때문이다. 선생님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싫다고 했다. 나는 그냥 지금 가라앉지 않고 수면 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왜 자꾸 발차기를 하라고 하시는지. 선택을 하라고 하시는지.


나는 울며 말했다. 살면서 너무 많은 선택과 결정을 해와서 이제 선택이 질리고 결정하는 것도 싫다고. 나는 한 발자국도 나가기 싫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내가 이렇게까지 상태가 안 좋은 것에 대해 다른 어떤 계기가 있는지 항상 물어보신다. 근데 난 맹세코 없다. 심지어 내 삶의 어떤 것도 숨기려는 생각이 없다. 근데 선생님은 항상 갸웃거리신다. 내 행태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뜻이겠지. 모르겠다 이제 나도 그냥.


우울로 도피하는 건지, 이것도 꾀병인지, 눈앞에 있는 것들이 싫어서 고개를 처박아버린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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