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과 진료일지
병원에 가는 것이 조금 익숙해진 것 같다. 이제 진료 중에 쏟아내듯 울지도 않고, 교수님과 대화를 수월하게 나눈다.
이번에 가서 이야기해야지 했던 것은
1. 저번주에 계속 폭식을 했는데, 저번주에 처방받은 스테로이드 때문일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 처방받은 약 때문일 수 있는지?
2. 필요시 약은 이제 처방 안 해주셔도 될 것 같다. 있어도 잘 먹지 않고, 이미 많이 쌓여있다.
3. 어떤 날은 괜찮고 어떤 날은 단어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4. 자해는 왜 하는 건지? 그전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것을.
이번에도 잊지 않고 말해야 할 것들을 잘 이야기하고 왔고, 교수님은 여전히.. 타임라인을 대충이라도 세워보라고 하시지만 그게 쉽지는 않다.
교수님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다. 항상 교수님은 본인의 예시를 들어주시는데, 그게 교수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교수님은 스트레스 상황일 때, 집중하지 않아도 되고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하신다고 하셨다. 짱 박혀서 레고를 하거나 아니면 게임해설방송 같은 것을 보거나 하다못해 옛날 예능을 몰아보신다고 하셨다. 또, 언제까지 쉴지 대충이라도 정해보라고 하셨다. 그래야 지금 쉬는 이 시간이 의미가 있어진다고. 근데 언제까지 쉴지 정하는 것 그게 싫다.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고 쉽지가 않다. 그냥 하루하루 사는 것 자체만으로도 지금 꽤나 많이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꾸 한 발짝씩 걸으라고 하시는 것 같아 교수님의 요청이 버겁긴 하다.
교수님은 생각을 깊게 하지 말고 조금 여유를 두고 생각하라고 하셨다. ’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도 있지. 실수는 과거이고 앞으로 잘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근데, 그것도 참 힘든 일이다. 왜냐면 실수를 한 것이 없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에. 또 요즘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사람들 많은 곳은 물론이고 밖에 돌아다니는 것도 피곤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마 물리적으로 체력이 떨어진 건 아닐 거라고 하셨다. 그것도 심리적인 건가..
우울증인 줄 알았는데 조울증이었다는 지인의 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도 조울증일 확률은 없나 여쭤봤는데, 조울증은커녕 복합성 우울도 아닌 그냥 우울증이라고 하셨다. 그건 좀 다행이다. (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조울증은 더 치료가 힘들 것 같은 느낌이다.) 교수님은 오히려 지금은 조증이라도 와서 기분이 좀 끌어올려지면 좋겠다고 까지 이야기하신 걸 보니 내가 많이 가라앉아있긴 한가보다. 내일은 비가 온다고 해서 좀 가라앉겠지만 수요일부터는 날이 다시 좋기 때문에 도서관도 좀 가보려고 한다. 도서관을 가거나 아니면 피시방에서 게임이라도 하려고 한다. 뭐든 시간을 그냥 보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리고 선생님이 머리맡에 있는 칼이나 가위부터 치우라고 하셨다. 가위는 일단 치우긴 했다. 그리고 감정을 들킬까 봐 혹은 자해흔적을 들킬까 봐 M을 만나는 것을 피하지 말고 그냥 자주 만나라고 하셨다. 그것을 굉장히 강조하셨는데 왜인지 모르겠다. 진료도 일주일이 채 지나기 전인 금요일에 다시 잡았다. 그것도 왜일까? 원래 매주 1회였는데.
이번에 새로 처방해 주시는 약에는 아침약에 항우울제를 몰아넣고, 밤에는 오로지 취침을 도와주는 약으로만 구성해 보겠다고 하셨다. 근데, 효과가 좋은 듯하다. 항우울제의 용량이 이 정도가 맞았는데 그간 너무 적은 용량을 먹은 건지도 모르겠다. 진료 다음날인 오늘 기분이 매우 나이스하고, 오후 느즈막이 가라앉는 것만 빼면 다 괜찮다.
웃긴 점 1. 검색해 보면 취침 전약도 다 항우울제로 검색된다.
웃긴 점 2. 병원을 다니기 전에도 나는, 정신병 없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론적으로. (근데 나 포함 진짜일 줄이야)
웃긴 점 3. 원래도 휴대폰을 달고 사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유튜브를 안 본 지 꽤 오래됐다. _ 우울증의 순기능 : 미디어 디톡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