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과 진료일지
까먹을까 봐 천안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면서 짧은 진료일지를 쓴다. 오늘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난다. 오랜만에 상담을 하다가 울기도 했다.(과연 오랜만에 운 게 맞는지..?) 월, 화요일엔 기분이 좋았으며 수요일쯤부터 기분이 가라앉았다고 설명드렸다. 선생님은 월, 화요일에 기분이 괜찮아서 쇼핑을 하고 영화도 본 것. 즉, 활동적인 일을 한 것은 정말 좋은 일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수요일엔 아빠랑 통화한 것도 말씀드렸다. 그 이후로 쭉 기분이 안 좋았단 것도.
아빠와의 통화가 부정적이라서 기분이 안 좋았냐 하면 그건 아니다. 아빠의 장난스러운 파이팅과 기대를 가볍게 다룰 만큼 내가 건강하지 못해서 기분이 가라앉은 것뿐이다. 어쨌건 아빠는 잘못한 게 없고, 내 주변 모두는 그대로이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만 달라졌을 뿐이다. 내 기분을 그지같이 만드는 원인도 엄연히 나라는 거다.
선생님은 굳이 부모님께 모든 걸 말할 필요도 없고, 내가 그간 독립적이고 활발해서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았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숨기는 것이 건강한 가족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셨다. 평생 건강한 엄마 아빠 밑에서 화목하고 건강한 가정을 유지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나 때문에 건강한 가족에 균열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선생님 말씀이 좀 듣기 싫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나로 인해 엄마나 아빠가 걱정을 하거나 죄책감을 가지는 것을 정말 절대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선생님의 말씀에도 이 병을 숨기는 쪽을 선택할 것 같다.
선생님은.. 내가 상황상. 그러니까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안정되지 않은 상황상 힘든 게 당연한데, 그것을 나의 요소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셨다. 고3이 힘들고 불안한 건 당연하듯이 상황상 내가 힘들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셨다. 나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다만, 나보다 훨씬 더 상황이 안 좋은 사람들도 잘만 살아가고, 이렇게 심적으로 힘들어하지는 않기 때문에, 내가 나약하다고 느낄 뿐이다.
선생님과 처음부터 아주 잘 맞는다 생각한 건 아니지만, 선생님은 열심히 나를 위해 주시고 결정적으로 거짓말을 안 하신다. 그게 보여서 좋다. 거짓말도 안 하시고 본인 이야기도 해주신다. 그래서 마음이 좀 편하다. 그리고 가끔 쓰시는 단어들에 대해 내가 되질문할 때가 있는데 약간 버벅거리면서 말씀하지는 걸 보자면 인간미까지 느껴진다. 인간으로서 믿음이 간달까. 그렇다. 나의 이 증상들을 좀 가볍게 다뤄주시는 것도 좋다.
선생님이 “책은 빌려줘도 안 읽으실 거죠? “라고 하셔서
“아뇨! 빌려주세요 저 책 좋아해요 ”
라고 했다.
책의 제목은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였는데 생물학적인 것과 심리학적인 것을 잘 다뤄놨다고 하시면서 빌려주셨다. 생물학적인 부분은 굳이 다 읽을 필요 없고 심리학적인 부분은 읽어보라고 하셨는데, 생물학적인 부분이 더 흥미로워 보인 것은 굳이 말 안 했다.
무튼 이번 주는 이례적으로 또 진료를 보러 오라고 하셔서 월요일, 금요일 이렇게 방문했는데 그게 그만큼 내가 심해졌다는 건지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월요일에 처방되었던 밤약은 정말로 잠이 잘 오고 중간에 잘 안 깬다. 효과 한 번 확실하다.